상식을 뒤엎은 화가 윤두서, 조선속화의 시작, 속화, 노승도
<윤두서 자화상> 중 귀와 몸통이 사라진 것에 대해 여전히 학계에서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전까지는 두 가지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숯으로 그린 것이 표구 과정에서 문질러서 없어진 것이다고 주장한다. 반면, 몇몇 다른 미술사학자들은 종이의 뒷면에 옷을 그려 넣는 배선법을 썼는데, 뒤에 비단을 대면서 그것이 유실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림을 대대로 집안의 가보로 전수받아온 해남 윤씨가 표구 과정에서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최근에 있었던 윤두서展의 심포지엄에서는 색다른 주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윤두서 자화상>의 귀와 옷은 윤두서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공재 윤두서 자화상 속 귀의 묘사는 공재의 솜씨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아주 세밀하게 그려낸 눈, 코, 입, 수염과는 달리 귀는 단순묘사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공재 윤두서가 그린 절친 심득경의 초상화를 든다. 이 초상화 속 공재가 보여준 정교한 묘사와 필력과 윤두서 자화상 속 그것을 비교하였을 때 동일 인물의 실력이라 보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또한 예복을 그린 모습도 공재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반측면의 그림인 심득경의 그림과 정면상인 윤두서 초상화의 귀의 묘사를 비교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찌 되었든 <윤두서 자화상>의 목과 몸통의 유실 이유는 아직은 미제로 남아있다. 최근 해남 윤씨 측에서 표구의 노화로 인하여 국립박물관에 수리를 맡긴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과정에서 뒤에 덧댄 비단을 제거하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을까?
윤두서의 시대는 환국의 시대라고 불린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신, 기사, 갑술 세 번의 환국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윤두서의 할아버지인 윤선도가 유배를 가기도 하고, 윤두서의 친형인 윤종서는 상소를 올렸다가 고문 중에 사망하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 '군도'의 모티프가 되었던 '장길산/이영창 사건'에 윤두서의 가족이 모함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윤두서는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두서는 녹우당(綠雨堂)이라 하는 할아버지의 고택에 자신의 작업장을 차린다. 그는 중국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오는 서양 신문물들을 비롯하여 화첩과 그림들도 사서 모은다. 그리고 그는 학문과 그림에 열중한다. 이전에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양반이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면 주홍글씨가 새겨지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윤두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그림에 중국과 서양의 그림 기법을 적용하기 시작한다. 윤두서의 시도들은 파격이었다.
그가 시도한 첫 번째 파격은 바로 '정물화'이다. 정물화(靜物畵)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주제로 그린 서양화의 한 장르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과일과 채소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있었으나 그러한 작품들은 주위에 약간의 잎과 줄기를 배치하거나 여러 과일을 모아놓거나 흩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윤두서의 채과도는 과일과 채소를 그릇에 담아 정돈시켜 작가의 의도성을 직접 드러낸 작품이다. 즉 진정한 정물화를 정립시킨 것이다. 그는 또한 그림에 명암을 적용하여 원근법을 드러낸다. 이러한 그림은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두 번째 파격은 '속화'이다. 윤두서 이전의 조선의 그림은 양반에게만 허용된 사치품이었다. 조선 초기 그림은 목적은 왕실과 양반들의 초상이나 여러 가지 의식들을 그리는 신분적 상류층들만을 윈한 것들이었다. 윤두서는 그 격을 깨버렸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두서는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가치가 달라지면 시선이 달라진다. 윤두서는 힘겨운 백성들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생긴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백성들의 삶의 고됨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은 한 눈에 보기에도 뛰어났기에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에게 관심이 쏟아지자 윤두서는 위기를 느낀다. 자신의 가문은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풍비박산이 났다. 혹여나 사람들이 의심하여 자신이 재기를 꿈꾼다고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한적한 선비의 삶과 세상의 쾌락을 등 뒤로 하고 스스로 고행의 길을 걷는 스님의 삶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정치에 뜻이 없음을 의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당파 싸움에 더 이상 휘말리기 싫은 그의 처세술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파격을 시도한 그의 그림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많은 양반들은 그에게 그림을 주문했다고 한다. 윤두서는 피카소와 같이 시대의 파격을 시도함으로써 많은 호평을 받은 인기 화가였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이에 남태응은 자신의 평론서인 「청죽화사」에서 다음과 같이 윤두서를 평했다.
강희안이 나자 안견, 최경이 대가 되고 신세림, 석경, 이불해, 이상좌가 서로 대가 되고 김제가 나자 이정, 학림정이 대가 되고 어몽룡이 나자 석양정이 대가 되고 김명국이 나자 이징이 대가 되었다. 김명국, 이징 두 사람이 죽은 뒤 근 백 년이 가깝게 비로소 윤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와 이름을 겨룰 자가 없으니 전인 들보다 더욱 빛나는 명예를 지녔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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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한쪽에 치우쳐서 두루 잘하지 못하거나 어떤 이는 두루 잘하나 공교하지 못했으니 요컨대 모두 작가라 할 수 없다. 그 모든 사람들의 것을 모두 집대성한 자는 오직 윤두서뿐이구나
윤두서展에는 <윤두서 자화상>을 관람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었다. 하지만 전시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은 단연 <노승도>이다. 이전에 고흐의 그림이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물감을 거의 찍어서 바른 듯한 붓의 터치와 무게감을 보면서 그림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와 동이한 압도감을 단순히 먹으로 구현해낸 작품이 <노승도>이다.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노승의 지팡이이다. 이 지팡이는 단 한 번의 획으로 그려져 있다. 언뜻 보기에도 화가가 붓을 얼마나 정교하고 힘 있게 그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그는 뒤편에 보이는 대나무와 노승의 옷자락 묘사에 신기에 가까운 붓놀림을 보여준다. 마치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듯한 이 그림을 실제로 보면 입이 떡하니 벌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가 이렇게 그림에 자신의 기개를 보여준 것은 단순한 심미적 이유였을까?
윤두서는 이후 조선 후기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그림은 우리나라 회화의 역사를 아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쉽지 않았던 파격을 행했던 화가, 큰 뜻과 기개를 그림에 담았던 화가. 윤두서를 알아가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