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 문고에 가니 『인간 실격』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있었다.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이 어디선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2007년 대학생일 때, 요조라는 가수가 데뷔했다. 그는 『인간 실격』의 주인공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말했다. 정말 재미없을 것 같은 제목이라 생각했다. 너무 심각한 것 같아서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실 20대 초반에는 자기 계발서나 조금 더 나은 미래를 그리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정말 재밌을 것 같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실격"이라는 단어에서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나의 모습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제는 현실에서는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 이야기나 판타지 소설보다는 내가 겪고 있거나 나에게 일어날 법한 일들이 더 잘 읽힌다. 어느덧 비극이 더 편한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책을 펼쳤다.
주인공인 요조는 인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음산한 마음을 지닌 존재로 인식한다. 그는 그의 본모습이 드러날 경우 가족들이나 주변인들이 그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 익살스러운 척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산다.
자신은 다른 인간들과 다르기에, 그것이 들키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않고, 좋아도 함부로 속을 드러낼 수 없다. 그 공포 때문에 익살스럽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어디서든 동화될 수 있는 가면을 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그는 음산한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솔직하게 자화상에 표현한다. 세상을 다른 방법이 아닌 보이는 대로만 그려서 ‘도깨비 그림’을 그렸던 반 고흐 마 모딜리아니처럼 그는 스스로를 흠칫할 정도로 음산하게 그린다.
그 그림은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던 친구 다케이치에게 ‘위대한 화가가 될 것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이 책을 통틀어 유일하게 요조가 만족해하며 행복해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도깨비 그림을 보고 나도 이런 도깨비식의 그림을 그릴 거라며 흥분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40 쪽
요조는 가면을 쓰지 않고 자신이 본 대로 표현하는 반 고흐와 모딜리아니를 부러워했다. 그들은 짧은 삶을 살았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가면을 쓰지도 않았다. 그들은 보는 그대로 그렸다. 이러한 욕구가 요조 안에 있었지만 요조는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다.
요조는 공포심을 동류의 사람들인 창녀나 공산당원들, 그리고 술, 담배, 마약 등 비합법적인 것들을 통해 이겨내고자 한다. 이것들은 도덕과 합법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도덕과 합법은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거대한 두 기둥이다. 애초에 요조는 스스로를 비사회적인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요조는 이 비사회적인 것을 함께 즐기는 뷰류들이 있다는 것에 안심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그들보다는 낫다고 하는 샤덴프로이데로부터 오는 우월감은 아닐까?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을 통해 나는 그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안도감과 우월감을 말한다. 예전에 교회에서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전하고 그들의 재기를 돕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어떤 여자 아이 한 명이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모여서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여자 아이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불쌍함과 감사함이 있어서라고 말했다. 여자 아이는 기본적인 생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노숙자들이 불쌍했고, 그러한 삶을 살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녀는 남의 불행을 보게 됨으로써 자신은 그들보다 낫다는 우월감과 자신은 그런 불행을 겪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느낀 것이다.
요조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소위 말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불행이 더해질수록 더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일부러 술집을 찾고, 일부러 가정사가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불행을 경험함으로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남들이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삶에 집착한다. 그는 정상적인 가정을 꿈꾸고 정상적인 친구를 갖길 바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정상적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요조에게 다시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고 그를 배신한다.
요조는 항상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보통의’ 인간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그가 죄를 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죄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그것에 대한 반어법조차 없다. 그저 죄의식만 있을 뿐이다. 해결책도 없다. 그저 그렇게 태어난 것에 대한 죄의식만 있다. 유일하게 요조가 죄에 대한 반어의 힌트를 얻은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의 그 밑 바다....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115쪽
죄의 반대말이 벌이라면, 요조가 지금 받고 있는 이 고통은 요조의 죄로 인함이 아니가 아니다. 그것은 벌이다. 그 벌은 누가 주는 것인가? 벌은 나보다 우월한 존재, 즉 신이 주는 것이다. 인생에서 반복되는 이 불행을 개인의 책임 또는 신이 주는 것으로 한정한다.
그것의 유일한 해결 방법은 사회에 동화되거나 신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요조는 이 두 가지 중 어떠한 것들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고립되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미친 자로 격리되어 무기력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아마도 누구든지 한 번쯤은 느낄 법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데 있다. 『인간 실격』은 요조라는 한 명의 개인이 철저히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느끼게 될까? 내가 그동안 느꼈던 말로 표현 못 할 것을 글로 표현했다는 것에 감탄할 수도 있다.
끙끙 앓던 것을 속 시원하게 표현해주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니면 요조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저 정도는 아닌데 다행이다’라는 안도와 우월의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한 편으로는 개인이 사회에 어떻게 순응하게 되는지, 그리고 순응하지 못할 경우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다자이 오사무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에 동화될 수 없고, 세상에서 규정한 인간이라는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무기력하게 살며 존엄성을 훼손당하느니 스스로 그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을 읽으면 우리는 주인공에게 동화되곤 한다. 그래서 한동안 우울하고, 그것을 너무 깊게 생각하다 보면 주인공처럼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그것이 편하니까. 왜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비단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연예인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 자신의 처지도 비슷하다고 느끼며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도 어릴 적 이 책을 읽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치 이 책을 읽으면 나도 우울해질 것 같으니까. 그 말인즉슨 나 또한 요조만큼의 불행은 아니지만, 당시에 불행을 겪고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다. 물론 행복했던 일들도 많지만 불행은 다른 모습들로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행을 너무 심각하게 해석할까 무서워서 이 책을 비롯한 비극을 읽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불행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불행의 연속을 경험하며 한다. 다만 비극은 단순하게 비극을 극대화해서 독자로 하여금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역할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니체는 비극이 오히려 관객이 자신의 삶을 한 단계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비극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을 법한 불행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모든 인생이란 이렇게 불행의 연속으로 이뤄져 있는 것이야. 어때, 그래도 너는 더 살 거니?”
그것에 대한 답은 개인적 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생산과 성장은 파괴와 더불어 일어난다. 디오니소스가 온몸이 찢기고 나서야 다시 부활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항상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성장은 이전의 것이 파괴되고 재생산됨으로써 가능하다.
즉, 우리가 불행을 겪고 다시 일어서고 하는 모든 과정이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인간 삶의 불행을 대리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읽고 자신의 삶을 분석하고 위로를 얻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삶에 돌아와 이전에는 갖지 않았던 시각으로 자신의 불행이나 세상을 바라본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비극이 가진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