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예술과 아우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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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NFT 예술이라는 것이 갑자기 이슈로 떠올랐다. 디지털 작가인 비플의 작품 Everyday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785억 원의 가격에 낙찰됐다. 이 가격은 살바도르 달리나 폴 고갱의 일부 작품들보다도 비싼 가격이다.
그런가 하면 테슬라의 CEO인 일론 머스크의 애인이자 가수인 그라임스가 워 님프라는 제목의 디지털 그림 컬렉션 10점을 온라인 경매에 올렸고, 이것들이 20분 만에 65억에 팔린 일도 있다. 대체 NFT 예술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이슈가 되는 것일까?
NFT는 Non Fungible Token의 약자로 한국말로 직역하면 ‘대체 불가능 토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서 디지털 자산에 별도의 고유한 인식 값을 부가함으로써 복제나 대체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디지털 자산에 NFT 값을 부가하는 행위를 민트라고 하는데, 이 민트 된 디지털 자산이 사고 팔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플이 처음 만든 그림 파일을 1.jpg라고 해보자. 이 파일을 민트 하면 이것에 고유 인식 값이 부여된다. 이 고유 인식 값은 복제가 불가능하고, 대체도 불가능하다.
만약 누군가가 이 이미지를 캡처한 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서 1.jpg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저장하더라도 원본 파일의 고유 인식 값은 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유 인식 값이 있는 파일만이 제작자가 만든 오리지널 디지털 자산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NFT예술의 매매행위가 예술적인 접근에서는 조금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아우라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019년에 나는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출발지는 러시아였다. 모스크바에는 푸시킨 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이 푸시킨 미술관은 예술가와 예술가 지망생들을 위한 교육 및 훈련의 장소로 고안됐다. 그래서 유명 유럽 조각, 건축사 걸작들의 복제품을 1:1 비율로 만들어서 넣어놨다.
푸시킨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면 미켈란젤로, 도나텔로, 베로키오의 다비드상도 있고, 산 조반니 세례당의 문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복제품이 너무 멋있어서 '이럴 거면 굳이 피렌체나 로마에 안 가도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똑같은 비율로 복제한 것이면 거기서 보나 여기서 보나 그게 그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피렌체에 도착해서 이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도착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원본을 실제로 봤을 때, 푸시킨 미술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압도되는 느낌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소재와 장소, 그리고 작품을 바라보는 눈높이 등등이 다르다 보니 당연히 작품 앞에서 드는 생각과 감동들도 다 달랐다.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복제품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진품만이 가진 역사적 유일성과 진품성에서 비롯되는 신비함, 영원성, 초월적 느낌'을 예술의 아우라라고 불렀다.
이 아우라는 예술가가 작품을 처음 제작할 때 고안했던 상황, 크기, 재료 등이 관람자에게 그대로 전해질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푸시킨 미술관에서 봤던 다비드 상의 복제품과 피렌체에서 봤던 다비드 상 원본이 다르게 느껴진 것이다.
우리는 아우라를 통해 진품은 진품만이 가진 특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 수많은 명화들의 사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접 미술관을 찾아 진품을 감상한다.
그런데 NFT 예술 같은 디지털 자산에는 이 아우라가 없다. 왜냐하면 이 그림들은 애초에 스크린 화면에서 관람되게끔 고안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상황이나 크기, 재료는 전혀 상관없다. 내가 안드로이드 폰으로 그림을 감상하거나, 아이폰으로 감상하나 다른 게 없다.
즉 진품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아우라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NFT 예술에서도 고유 식별 코드가 있는 그림파일을 보나, 그 그림파일을 캡처한 복사 파일을 보나 똑같은 상태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그게 무슨 문제지? 화이트 큐브 안에 갇힌 예술이 모든 대중에게 쉽고 평등하게 같은 상태로 전해진다면 더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이것이 판매가 되는 행위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도 그림을 볼 수 있지만, 굳이 진품을 소유하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아우라의 소유다. 진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아우라를 지속해서 얻고 싶어서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시 욕구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 작품을 '내가 가지고 있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투자다. 어떤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가격이 천정부지로 뛴다. 그 차익을 노리고 예술작품을 사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데 예술작품들이 디지털화되면 아우라, 과시, 투자 세 가지가 모두 다 사라진다. 일단 처음에 만든 디지털 파일이나, 그것을 캡처한 파일도 화면 속에 보이는 모습은 같으니 아우라가 없다. 또한 누구든지 화면의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과시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가질 수 있기에 투자 가치가 없다.
그러나 NFT기술이 적용되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일단 여전히 처음 파일의 모습과 캡처된 화면의 모습은 같다. 따라서 진품만이 가지는 아우라는 없다.
하지만 처음 파일과 캡처된 파일에는 엄연히 진품과 복제품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바로 NFT기술이 적용되어 진품에는 고유 인식 코드가 있는 것이다.
이제 고유한 최초의 파일이 존재함으로, 아우라는 소멸되었지만 진품을 통한 과시와 투자의 기능은 가능해진다.
비플의 그림을 산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는 '진품에서만 느껴지는 고유한 아우라가 있어서 이것을 집에 놓고 매일 보고 싶어. 그래서 나는 이것을 구매했어.'라고 말할까? 아니다.
그는 이것이 바로 고유 인식 코드가 있는 비플의 진품 파일이다. 내가 이것을 785억에 샀다. 이건 가치가 더 오를 거야'. 하는 식으로만 말할 것이다. 결국 NFT기술은 예술의 소유가 아닌 파일의 소유를 뜻하게 되어 버렸다.
이제 디지털 예술세계에서 예술의 아우라를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없어질 것이다. 애초에 디지털 예술에는 아우라가 없기 때문이다.
NFT예술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과시와 투자를 목적으로 파일을 구매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작품을 판매할 때 '아마도 이 그림을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더 많은 돈을 벌 거야'라는 식으로 작품을 판매할 것이다.
어떤가? NFT예술을 아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 행위들로 인해 아우라가 소멸되고 예술이 예술적 기능보다는 과시와 투자의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분들은 NFT예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