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의 미학으로 본 성장과 예술의 관계
이 글은 유튜브로도 시청이 가능합니다
*이번 화는 제가 녹음 버튼을 잘못 눌러서 음질이 안 좋습니다.
다음부터는 더 주의해서 좋은 영상 만들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성장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교육과 경험으로 형성된 한계를 넘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한계 짓고 또 그것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는가?
한계는 스스로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온다. 인간은 축적된 경험을 통해 나라는 자신을 한계 짓는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 이것과는 맞지 않아, 이건 잘 못해,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라는 식으로 스스로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런 편견과 선입견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행동 인지 심리학에서는 편견과 선입견이 생기는 이유를 세 가지로 규정한다.
첫 번째는 빠르게 반응하고, 생각을 덜 하기 위함이다. 2002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과 그의 동료 아모스 트버스키에 의하면 인간은 어떠한 의사 결정을 내릴 때, 수도 없이 많은 정신작용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뇌의 부담은 적지 않게 고통스러운데, 이를 덜기 위해서 인간은 전략, 고정 규칙, 템플릿 등을 만들어서 최대한 생각 없이 빨리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뇌를 다쳐 직감적 선택을 할 수 없이, 합리적 결정만을 할 수 있는 환자들에게 두 가지의 옵션을 주고 선택을 하게 했을 때 이들은 굉장히 오랜 시간을 가지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렇게 더 나은 결정에 대한 고민과 생각은 뇌에 큰 부담을 주기에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익숙한 방법을 택한다.
두 번째는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이것을 오류 관리 이론이라고도 하는데, 큰 위협이 있을 것을 대비해 가능성이 있는 작은 위협조차도 피하는 것이다. 모든 변화에는 불편이 동반된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괜히 변화를 시도하다 겪을 불편이 두려워 현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전의 답이 지금도 통할 거란 믿음이다. 이전의 방법이나 행동으로도 잘 살아왔다고 믿기에 이전 선택은 충분히 이성적인 선택이고 오류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과 선입견은 두 가지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 번째는 스스로를 규제하고 틀 안에 가둠으로써 개인의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편견과 선입견이 생겨버리면 올바른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외의 다른 답들은 모두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맞는 것이고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틀 안에 가둔다.
편견과 선입견에 갇힌 사람들은 내가 지금 가진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렇게 살아도 아무 일 없었고, 그 삶이 나에게 안정감을 줬기 때문이다. 반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이전의 편견을 깨야하고, 그것이 잘 될지 안 될지 정확히 모르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 넓은 시야는 제한된다.
두 번째로 이러한 편견과 선입견이 나아가 집단적으로 형성되면, 타 집단을 차별한다. 스스로 속해 있는 집단인 내집단을 우월화하고 다양호 하지만, 외집단은 열등화하고 일반화한다. 젠더, 인종, 학력, 직업 등의 편견과 선입견들은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예들이다.
그러니 편견과 선입견으로 형성된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성장을 이루고, 집단적으로는 편견 없는 더 나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편견과 선입견을 없앨 수 있을까?
위스콘신 대학교의 퍼트리샤 디바인 교수는 편견을 깨려면 이미 자동화된 나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벗어나, 상대방의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간호사들에게 고통스러운 백인과 흑인 환자들의 사진을 주고 어느 정도의 진통제를 줘야 하는지 의견을 묻는 실험을 가졌다. 그들 중 한 그룹은 ‘최선의 판단을 내려라’라고 물어봤고, 이 그룹은 백인들에게 더 많은 진통제를 처방했다. 최선의 방법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들은 암묵적으로 인종에 대한 편견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른 한 그룹은 ‘그들의 상황이 되어 느낌을 상상해보라’고 물었고 이 그룹은 인종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진통제를 처방했다. 간호사들은 이전에 자신이 최선이라 생각했더 점에서 벗어나 환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봄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던 암묵적 편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렇게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타인이나 외부 그룹의 눈에서 바라보는 경험이다. 이 경험이 가능한 활동이 바로 예술작품 감상이다.
미학자인 데이비드 흄은 『취미의 기준에 관하여』라는 논고에서 예술을 잘 감상하려면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작가가 의도한 청중의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에 어울리는 효과를 정신에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조망되어야만 하고, 누군가의 상황이 작품이 요구하는 상황에 적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 작품을 충분히 음미할 수 없다.
모든 예술은 반드시 관객에게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림을 그리든, 노래를 하든, 시를 쓰든 그것은 나 혼자 즐기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작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이고자 한다. 그 시대의 관객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 관심, 정념,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공감하지 못하면 우리는 예술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은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신윤복의 작품 <목욕하는 여인들>이라는 작품을 한 번 예로 들어보자. 이 그림에서 여인들의 목욕을 훔쳐보는 동자승 두 명이 현시대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그림이다. 그저 해학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굉장히 파격적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인간의 욕망은 부처의 가르침과 수도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는 한 마디로 신성모독의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감상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그 예술작품이 의도한 시대의 청중의 입장에서 감상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술 작품이 의도한 바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예술 감상을 통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과거의 미술 작품들을 감상할 때 당시 사람들이 돼 보기도 하고, 문학 작품이 쓰이던 시기의 주인공의 입장도 된다. 같은 시대에 있을 때에도, 나와 다른 직업, 성별, 인종 등의 입장이 되어본다. 이러한 훈련들을 통해 우리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한계, 집단의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
우리는 알고리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답과 나의 취미가 최선이라 여기고, 그와 비슷한 경험만을 지속한다.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위협도 없고, 이전에 아무 문제없었으니 이번에도 잘 될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와 집단을 한계 짓는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이나 기존 사회에 위협을 가하는 도덕규범에 어긋난 것들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갖는다. 이렇게 우리는 점점 스스로를 한계 짓고 고립시킨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나와는 다른 입장, 타인의 시선에서 문제를 바라봄으로써 가능하다. 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 감상이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나의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한계를 뛰어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