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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Oct 09. 2022

이중섭 전시에 가서 펑펑 운 사연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전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카타르시

01

다른 그림들과는 다른

<아버지와 두 아들>



<아버지와 두 아들>, 1954, 종이에 유채, 30x41 cm, 국립현대미술관


제가 얼마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전에 다녀왔는데요. 거기서 어떤 그림 하나 보고 펑펑 울었어요. <아버지와 두 아들>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사실 이중섭 작품 중에는 두 아들을 담은 그림들이 많아서 그게 뭐가 특이하냐 물을 수 있어요.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인 물고기와 게와 아이들의 모습만 해도 그렇고, 수많은 은지화 편지화에도 그런 모습들이 존재하죠.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전반, 종이에 펜, 유채, 32.8x20.3cm, 국립현대미술관


제가 특별히 이 그림을 보고 눈물이 쏟아졌던 이유는 이 그림은 다른 그림들하고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에요. 먼저 아이와 물고기와 게를 한 번 보시면 이 그림은 굉장히 색체가 밝죠? 아이들의 표정도 밝고요. 밥 사 먹을 돈도 없어서 게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지만, 가족들과 함께였기에 즐거웠던 제주도 생활을 기억하며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가족을 주제로 한 그림에는 항상 아이들과 이중섭 본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죠. 곧 아이들과 만나 다시 행복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담긴 작품들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색체가 밝거나 따뜻하고, 선들도 명쾌했죠.


이중섭의 가족을 그린 다른 그림들


그런데 제가 처음에 보여준 작품은 이중섭이 가족을 표현한 이전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더라고요. 일단 색채가 굉장히 어두워요. 아이들과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도 보이지 않았죠. 실제로 그림을 보면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서 그린 고흐의 그림 같았어요. 이상하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현해탄>, 1950년대 전반, 종이에 펜, 유채, 크레용, 13.7x21.5cm. 국립현대미술관


이 그림은 이중섭이 죽기 1-2년 전에 그린 그림이에요. 제가 이 작품을 보자마자 슬펐던 이유는 이 당시 이중섭의 심리가 드러나는 것 같아서였어요. 이 작품의 옆에는 '현해탄'이라는 그림이 걸려있어요. 현해탄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바다인데, 그림을 보시면 일본에 있는 가족들을 향해 이중섭이 현해탄을 건너는 모습이 그려져 있죠.


그런데 이중섭이 건너고자 하는 현해탄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존재해요. 현해탄을 건너고 싶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있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죠. 실제로도 이중섭은 당시에 현해탄 건너에 있는 가족들을 너무 그리워했지만 그럴 수 없는 사실에 좌절했거든요.


아버지와 두 아들들 실제 전시 모습


아버지와 두 아들은 이중섭의 그 좌절이 표현된 그림이었어요. 거친 붓놀림과 어두운 색채 표정이 없는 인물들은 당시 이중섭이 얼마나 고통 속에서 가족들을 그리워했는지가 드러나는 그림이었거든요.

이중섭은 삶에서 줄곧 가족들과 이별을 경험했던 사람이에요. 북한 원산에 있을 적에는 공산당에 의해 형을 잃고, 또 한국 전쟁 이후에는 가난 때문에 가족들은 일본에 자신은 한국에 떨어져 살았죠. 그래서 그에게 가족은 언제나 이루지 못한 소원이었고 욕망이었던 거 같아요.



이러한 배경을 아니까, 두 아들과 아버지는 절실한 바람에도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그것을 분노로 표출한 작품처럼 느껴졌어요. 이중섭의 마음과 상황이 이해가 되니 그에게 동정감이 느껴졌고 이 때문에 눈물을 흘렸죠.


02

카타르시스

연민과 두려움



카타르시스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예술을 통해 관람자가 주인공에게 연민과 공포를 느끼고, 어떤 비극적인 감정을 분출함으로써 정화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슬픈 영화 같은 거 보고 펑펑 울고 나오면 개운한 느낌 드는 그런 때 있잖아요.


이 카타르시스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연민과 공포가 일어나야 해요. 연민은 '아, 이 사람 진짜 불쌍하다' 하는 거고, 공포는 '와... 이런 일이 나한테도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그런 감정이에요. 그래서 작품의 주인공이 우리랑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너무 똑같아도 안돼요. 막 어벤저스나 해리포터 이런 거는 우리한테 일어나지 않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아이언맨이나 해리포터의 교수님이 죽었다고 해서 막 펑펑 울지는 않아요. (우는 사람도 있으려나?) 그렇다고 너무 우리랑 똑같은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올만한 게 없죠. 매일 똑같이 겪는 일일 뿐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중섭의 작품은 내가 겪을 수 있을 법한 일을 보여줬고, 그것 때문에 눈물이 났던 거 같아요. 얼마 전에 저와 가까운 지인이 가족 중에 한 명을 떠나보냈어요. 그걸 보면서 만약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나는 마음이 어떨까를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이중섭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저도 미국에서 유학할 때 가끔씩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은데, 물리적으로 뵈러 갈 수가 없을 때가 있었어요. 그때 가족이 엄청 보고 싶었거든요.


언젠가는 그런 일들이 나에게도 닥친다면 아마 나도 이중섭과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때에는 나도 아마 이중섭과 같이 표현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것 때문에 아마 더 많이 울었던 거 같아요.


혹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전 다녀오셨나요?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예술은 관람자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이를 통해 감정이 정화되고 그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아직 다녀오지 않은 분들은 이 작품 한 번 느껴보셨으면 하고, 다른 예술을 접할 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카타르시스를 생각하면서 한 번 즐겨보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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