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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Oct 06. 2022

니체 미학과 공포스러운 그림이 예술인 이유?

뭉크의 <절규>는 희망의 그림이다


01

뭉크의 그림은 

공포스럽고 

의문스러웠다



The Scream. Edvard Munch. 1893. Oil, tempera, pastel and crayon on cardboard. 91x73.5cm. National Ga


내가 처음 뭉크의 <절규>를 마주한 것은 3년 전 러시아 여행 때다. 트리티야코프 현대 미술관에서 에드바르 뭉크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절규>는 고등학교 미술책에서도 본 적이 있고, 스크림이라는 옛날 공포 영화에서 범인이 쓰고 나온 가면으로 익숙한 그림이다. 실제로 <절규>를 마주하니 이 말이 가장 먼저 나왔다.


'이게 왜 예술이지?'


흔히 예술이라 하면 보기에 아름답고 쾌감을 주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뭉크의 <절규>는 쾌감보다는 '불쾌감'을 주는 그림이다. 절망적인 모습의 인물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고 있고, 배경은 강렬한 색체와 혼란으로 인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리를 지르는 인물 뒤로 검은색 옷을 입은 두 명의 사람은 마치 그를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려 하는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뭉크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첫 번째는 과거에 있었던 고통스러웠던 순간과, 두 번째는 미래에 저렇게 공포에 떨며 소리를 지를만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다시 말해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뭉크의 작품은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체 뭉크의 작품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가 있을까? 이러한 나의 질문은 몇 년 후 니체 미학을 공부하면서 말끔하게 풀렸다. 니체 미학은 뭉크의 <절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02

예술은 삶을 긍정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도구다



Portrait of Friedrich Nietzsche. Edvard Munch. 1906. Oil on Canvas. 201x160cm. Thiel Gallery Blue


니체에게 예술의 중요성은 얼마나 아름답고 형식적으로 완벽하냐가 아니라, 예술이 삶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다. 일단 니체가 말하는 세상과 인간 삶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니체가 말하는 세상은, 세상을 이루는 각각의 것들이 '힘을 가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힘을 가지고자 하는 각각의 것들이 점점 그 의지가 강해지면 서로 충돌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고통과 모순이 생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고자 하는 의지와 더 자고자 하는 의지의 충돌이 일어난다. 이불을 갤까 하는 의지와 그냥 두자 하는 의지가 충돌한다.


이 충돌은 고통을 낳는다.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와 머무르려는 의지의 충돌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로 건강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 건강을 망가뜨리려 하는 의지들이 충돌한다. 건강을 망가뜨리고자 하는 힘의 의지가 더 강하면 몸은 병을 얻는다. 건 상하 고자 하는 힘의 의지가 더 강하면 몸은 건강을 유지한다.


이 의지들의 충돌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오늘 내가 더 자고자 하는 의지를 이기고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지라도, 내일 아침에 또 이길 것은 장담할 수 없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들은 힘을 가지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충돌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때문에 인간 삶 또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통과 모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니체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인간(흔히 초인으로 번역되는, Übermensch)은 고통과 모순의 연속인 인간 삶을 긍정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고통과 모순은 인간 삶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또한 이 사실을 긍정하는 데에서 끝내지 않고, 나아가 비극적 통찰과 개관을 이룬다. 이들에게는 이미 겪었던, 지금 겪고 있는, 앞으로 일어날 인간 삶의 비극적 고통을 긍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떨게 인간 삶의 고통과 모순을 긍정할 수 있을까? 니체는 그들의 도구가 바로 예술이라고 말한다. 예술은 단순히 감각에 쾌락을 주는 것만을 묘사하지 않는다. 예술은 인간의 고통, 비극, 삶의 어두운 모습까지 가감 없이 표현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인간 삶의 비극적 가능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것이 비록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임에도 인간은 그것을 긍정하고 마침내 개관하고 성장해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간다.


03

예술이 

종교나 도덕보다 

우월한 점



Christmas in the Brothel. Edvard Munch. 1903-04. Oil on canvas. 60x88cm. Munch Museum. Oslo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인간 삶의 고통을 긍정하고, 극복해서 성장하게 하는 역할은 도덕이나 종교, 학문, 역사들도 가능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들은 인간 삶과 조금은 떨어져 있다. 특히 기독교적 도덕은 인간의 성적 욕망이나 부에 대한 욕망을 부정하고 억압한다. 그들은 성적인 욕망은 문란하다고 비하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땀 흘려 일한 자들만이 옳다고 말한다. 성적인 욕망을 가지고, 땀 흘리지 않고 부자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자들의 최후는 지옥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죽음 이후, 천국에 가기 위해 육체와 지배욕을 억압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힘을 갖고자 하는 성적인 욕구의 의지와 지배 의지는 억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의지들은 억압해서 힘을 갖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의 의지와 끊임없이 충돌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과 모순을 겪는다. 결국 기독교적 도덕 안의 인간은 극복하기보다는 끝없는 고통을 겪으며 숨길뿐이다.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형이상학적 사후 세계의 안정을 위해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종교와 도덕이라는 족쇄에 잡힌 인간은 노예의 삶을 살 뿐이다.


반면에, 예술은 우리의 현재를 긍정하고 인정한다. 우리의 어두운 감정이나 욕망들도 순수하게 드러낸다. 그것이 비록 비극적인 일들을 다루고 있고, 비도덕적, 비종교적일 지라도 그것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인생이 비극적일지라도 그것을 긍정하고, 통찰과 개관을 통해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극복해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예술을 종교나 도덕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04

뭉크는 

당신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다.



Self-Portrait with the Spanish Flu, Edvard Munch. 1919. Oil on canvas. 150x131cm. National Gallery


니체는, 예술은 가장 아름다운 표본이 되는 자연의 모습이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 속 세계, 성경 속의 세상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은 인간 삶 속에 보이는 모순과 참혹함, 죽음까지도 나타낸다. 이를 통해 인간은 고통, 두려움과 마주하고 긍정하게 된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들을 통찰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함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뭉크는 이러한 니체 미학에 크게 감명받았다. 왜냐하면 뭉크의 삶 자체가 굉장히 모순적이고, 고독하고, 죽음과 항상 가까이 있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뭉크는 만성적인 류머티즘과 천식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병으로 잃는다. 젊은 시절 그의 사랑은 모두 안 좋은 결말로 끝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총을 맞기도 한다. 그로 인해 뭉크는 정신착란 증상을 겪기도 했다.


니체의 미학은 이렇게 모순적이고 비참한 뭉크의 인생이 뭉크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선택적 비극이 아님을 알려줬다. 뭉크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모순과 고통, 참혹함을 긍정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캔버스에 옮겼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의 삶에도 이런 고통이 있었습니까? 당신의 삶에도 이런 고통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도 사랑의 아픔을 겪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삼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


05

이제 뭉크의 그림이 

어떻게 보이는가?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지 3년이 지났다. 그리고 3년 만에 뭉크의 <절규>를 다시 만났다. 니체 미학을 공부한 뒤 <절규>를 다시 마주했을 때 감정은 이전과 많이 달랐다. 이전에 내가 느낀 감정은 공포와 스산함, 알 수 없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시 느낀 감정은 공감, 긍정, 희망이다. 이전에 내가 가졌던 생각들은 모두 해체됐다. 그리고 새로운 감정들과 생각들이 풍요롭게 생산됐다.


니체는 인간이 공포스럽고 의문스러운 예술을 접한 뒤 이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마치 디오니소스와 같다고 말한다. 디오니소스는 갓난아기 시절 거인에 의해 온 몸이 찢겨 죽는다. 하지만 그는 가시 부활하고 풍요와 생산의 신으로 자리 잡는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공포스럽고 의문스러운 것에 대한 주시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끔찍한 행위와 파괴와 해체와 부정의 모든 사치를 허용한다. 그에게는 모든 사막을 풍요로운 과일 재배지로 만들 수 있는 넘쳐흐르는 생산력과 재건력이 있기에 악과 무의미와 추함이 허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뭉크의 <절규>는 공포스럽고 의문적이지만, 이것들은 인간 삶에서 충분히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을 보여준다. 관람자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에게 벌어진, 벌어지고 있는, 벌어질 수 있는 비극적인 일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관람자는 비극적인 사건과 고통을 긍정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극복해낸다. 예술은 이처럼 인간 삶을 가감 없이 묘사함으로 인간 삶 그 자체를 긍정하며 성장하게 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자, 이제 당신은 뭉크의 <절규>가 어떻게 느껴지는가?



https://blog.naver.com/hogny1/222888914071

https://youtu.be/agEFA-GKe_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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