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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킬로도 못 뛰던 내가 이제는 풀코스를 매달 뛴다

창의성과 정의, 그리고 달리기와 마르셸 뒤샹

by 예술호근미학

결국 10킬로는 쉽게 뛸 거면서


"호근 씨, 나 늦으면 버리고 가요"


이전에 10킬로, 하프마라톤까지 뛰었던 크로스핏을 하는 친구와 같이 10km 마라톤을 나갔다. 몇 달 전에 발목이 부러졌던 친구인데 얼마 전부터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고 이제 막 3-4킬로를 달리는 친구였다. 주치의가 10킬로는 무리일 거라고 천천히 걸으라고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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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내가 보기엔 10킬로를 달리는데 아무 이상 없어 보였다. 며칠 전에 크로스핏을 하면서 줄넘기를 하는 것을 보니 굉장히 잘 뛰었다. 기록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줄넘기와 달리기는 원리가 같다.

둘 다 점핑을 하는 것이다. 줄넘기는 상하로, 달리기는 그 에너지를 앞으로 보내는 것이다. 게다가 10킬로 대회, 하프 마라톤 대회를 나갔었고, 지금도 매일마다 3킬로를 뛰는 친구이기에 10킬로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다친 기억 때문에 그리고 주치의의 의견 때문에 그 친구는 계속 부정적으로 자신은 못 뛸 거라고 중간에 아프면 그만둘 거라고 투덜댔다. 하지만 3킬로가 지나가자 그때부터는 달라졌다. 막상 달려보니 다리가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평소에 한계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깨지자 갑자기 속력이 올라갔고, 거뜬히 부상 없이 무사히 10킬로를 달렸다.


과거의 경험과 주치의의 정의에서 벗어나보니 이전에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정의가 바뀌니 풀코스를 뛰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난다. 풀코스 마라톤을 달려본 동생과 만나 달리기를 하는데, 시작부터 10킬로를 달렸다. 나는 이전에 살면서 최장거리를 뛰어본 것은 군대에서의 3킬로 구보였다.


10킬로를 다 뛰고 들어오자마자 땅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은 더러웠지만 그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숨이 가쁘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밤새 누군가가 때린 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는 10킬로를 매일 뛰는 그 동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10킬로가 이렇게 힘든데, 풀코스는 어떻게 뛸까?'

'나는 살면서 풀코스 마라톤 한 번은 뛸 수 있을까?'


하지만 계속 뛰다 보니 어느 순간 내 거리는 조금씩 늘어났다. 하프 대회를 나가보니 결국에는 완주를 하게 되었다. 30km로 한 번 뛰어보고 풀코스 마라톤도 나가봤다. 그리고 결국 해냈다. 지금은 어떨까? 올해에만 풀코스 마라톤을 4번이나 뛰었다. 이제는 10킬로는 매일 뛰는 조깅 수준이다. 나에 대한 정의가 바뀌고 나니 이전에 어렵던 것이 쉬워졌다.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한계를 정한다. 우리의 정의가 바뀌는 순간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을 하게 된다. 세상은 사실 이름 짓기에 달려있다. 모든 것들은 내가 이름 지은 것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을 가장 쉽게 보여주는 예가 마르셸 뒤샹의 샘이다.



마르셸 뒤샹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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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공장에서 생산된 도자기 변기 하나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그곳에 mutt.r이라는 사인을 한다. 사람들은 의아했다.


“이게 예술이라고?”
“이건 그냥 변기잖아.”


하지만 뒤샹은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샘(Fountain). 공산품인 변기가 어떻게 예술이 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변기라는 정의만 뺀다면 형태적으로는 비례미와 조형미는 아주 완벽한 조각이다..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변기는 더 이상 변기가 아니었다. 세상은 그것을 예술로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변기를 예술로 만든 것은 변기가 아니었다. 이름이었다. 정의였다. 우리가 한계를 어디까지 정하는지는, 사실 내가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느냐에 달려 있다.


내 삶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태어난 환경과 내 주변 사람들에 의해 나의 역할을 정한다. 이전의 나의 삶은 그저 평범한 대학원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8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일에 대한 정의, 삶에 대한 정의가 바뀌는 순간 나의 인생도 바뀌었다.


창의성이란 기존의 지식, 경험, 아이디어를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거나 변형하여, 새롭고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의 시작은 대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내가 10km 달리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기존의 경험이나 환경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미 하프, 풀코스를 뛸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의를 바꿔보자. 그러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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