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술호근미학 Feb 14. 2016

열려라

2016.2.14 마가복음 7:31-37, 정찬일 목사님

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다. 패럴림픽에서 손이 하나 없거나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운동경기는 많아도, 시각장애인이 하는 운동은 거의 없다. 그만큼 보는것은 중요한데,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집에 가서 넷이 같이 '원초적 본능'이라는 야한 비디오를 본적이 있었다. 소파에 앉아 비디오를 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때, 집에 친구의 어머니가 계셨다는 점이다. 티비는 거실에 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비디오를 봤다. 그러다가 어머니께서 방문을 열고 나오시면 친구가 황급히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그리곤 친구 넷이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어머니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시면 티비를 켜고 비디오를 봤다. 그러다 엄마가 또 나오시면 티비를 껐다. 어머니가 집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영향력이 없었다. 잠시 문을 열 때 우리는 비디오를 안본 척 하면 됐다.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항상 우리 삶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이 방문을 여실 때에만 잠시 하나님을 의식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눈을 고쳐주신다. 이것은 단순히 눈을 고치신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41절을 보면 예수님은 오히려 맹인이라고 한다면 죄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육적으로 보는것만이 아닌 영적으로 보고 느끼기를 원하신다.


시각 장애인 중에 뛰어다니는 시각장애인은 없다. 시각을 제외하고, 두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도 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넘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시각장애인이 어느 날 뛰어보았다고 치자. 막상 한걸음 한걸음 뛰어보니 뛸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 다음날부터 뛰어 다닐수 있을까? 그럴수 없다. 그는 반드시 언젠가 넘어지게 되어 있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인생의 답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데 달려가는 삶이 옳은 삶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삶은 100% 무너지고 넘어진다. 우리는 뛰는 삶을 중단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일본의 몰래카메라 중에 '백인 돌격'이라는 몰래카메라가 있었다. 좁은 골목에 한명의 길을 걸어가는데 반대 편에서 100명의 사람들이 한 명을 향해 달려오는 몰래카메라였다. 이 몰래카메라의 주인공들은 반대편에서 100명의 사람들이 달려오면 가방을 내던지고,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함께 뛰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웃겨 많은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 중에 누구 하나 달리는 사람을 붙잡고 "어디로 뛰는 거에요?" "왜 뛰는 거죠?"하고 묻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그들은 백 여명의 사람이 뛰니까 자기도 모르게 같이 뛴 것이다. 우리의 삶은 다른가? 남들이 다같이 하는 대학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고, 좋은 직장을 위해 취업 공부를 한다. 열심히 달리고는 있지만 어디를 가는지, 왜 뛰는지 묻지도 않고 그저 달린다. 우리는 목적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물어봐야 한다. 


요즘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모를 때에는 어떠한 일에 실패 했을 때, '그래 내 노력이 부족하구나. 다음에 더 열심히 하자.' 하는 마음들이 있었다. 그런데 수저 계급론을 알고 난 뒤에 어떠한 일에 실패하면 "내가 흙수저라 그래"라며 상황을 원망한다. 물론 시대적인 상황이 어려운 시기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대적인 상황과 담론에 매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이라는 벽을 뛰어 넘기를 바라신다. 세상과 비교하고 그 비교에 목숨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왜 부르셨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있을까? 만일 누구와 대화를 하는데 옆에서 커다란 드럼소리가 들린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앞에서 대화하는 사람에게 더 크게 말해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드럼을 치는 이에게 잠시 드럼을 멈춰달라고 하거나 자리를 옮길 것인가? 정답은 후자이다. 시끄러운 드럼 앞에서는 아무리 크게 말해도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지만 드럼 소리가 없는 곳에서는 작게 이야기 하여도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요소를 멈춰야 한다. 육정인 즐거움을 중단하고 영적으로 민감한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을 잘 통제 해야 하며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멈춰야 한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요소를 모두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하자.


작가의 이전글 내 목소리를 들으셨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