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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Jun 27. 2017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화가 장미쉘바스키아 -전반부

장미쉘바스키아, 흑인화가, 바스키아 크라운

세계에서 가장 비싼 흑인 화가


바스키아의 <무제>

2017년 5월 18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바스키아의 1982년작 회화 '무제'가 치열한 가격 경쟁 끝에 1억 1050만 달러(약 1248억 원)에 낙찰됐다. 언론은 이것은 미술품 경매 사상 역대 6번째로 높은 가격이며, 앤디 워홀을 넘어선 미국 작가로서는 가장 높은 낙찰가라고 발표했다. (미국인인 잭슨 폴록의 No.5 낙찰가는 1억 5000만 달러였는데...) 어찌 되었든 간에 바스키아는 명실상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현대 미술가가 되었다.


데이빗 보위가 출연한 영화 바스키아 中


장 미쉘 바스키아의 그림은 그가 활발히 활동할 때와 그의 죽음 이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데이빗 보위, 제이지, 조니 뎁, 마돈나 등은 그의 그림을 사랑한 대표적인 유명인사들이다. 특히 데이빗 보위는 영화 '바스키아'에 앤디 워홀 역으로 출연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제이지는 자신의 2013년 앨범 중 'Piccaso baby'라는 곡에서 바스키아를 언급하고 그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풍자했다.


그의 그림의 트레이드 마크인 '바스키아 크라운'은 상업 미술에도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바스키아 크라운은 티셔츠, 모자 등에 많이 프린팅 되고 있다. 바스키아라는 이름은 처음 들을지라도 사진을 보면 '아!.. 이것이 바스키아 크라운이구나'하게 될 것이다. 그의 그림은 경매에 나올 때마다 굉장히 비싼 값에 팔린다. 그는 명실상부 가장 비싼 그림을 파는 흑인 화가이다.


바스키아 크라운이 그려진 티셔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가치를 인정받는 위대한 화가는 그가 27세가 되던 해인 1988년 8월 12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코카인 중독으로 사망한다. 대체 이 화가의 그림은 어떤 가치가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비싼 값으로 팔릴까?


흑인 화가가 어떻게 유명해졌을까?


8-90년대 미국에 흑인 화가는 없었다. 노예해방 운동을 통하여 법적으로 흑인들의 인권이 보장되었고, 사회적 약속으로 인종차별은 금지되었다. 겉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 같았지만, 이미 뿌리 박혀 보이지 않는 정신은 여전히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고 차별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상류층의 특권이 되어버린 미술계에서는 이것이 더 심했다. 그들은 흑인 화가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에서 바스키아는 어떻게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앤디 워홀'과 '회화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설명이 가능하다. 


앤디 워홀

앤디 워홀

당시 예술계의 아이콘은 바로 '앤디 워홀'이었다. 그는 미술, 영화, 광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위대한 작가 앤디 워홀이 장 미쉘 바스키아라는 흑인 화가를 대중에게 소개한다. 앤디 워홀은 바스키아의 그림을 구매하고, 전시를 열어주고, 또한 협업을 한다. 대중은 '앤디 워홀이 주목한 흑인 화가' 바스키아를 맹신한다. 그의 그림이 어떠하든 간에 가격은 천정부지로 비싸진다. 화랑들은 서로 앞다투어 바스키아의 전시회를 열어준다. 비엔날레에서는 출품을 권유한다. 이렇게 '뜨고 있는' 화가를 미디어가 가만 놔둘 리가 없다. TIME 지는 바스키아를 표지모델로 삼고, TV에서는 바스키아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었다. 순식간에 장 미쉘 바스키아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작가가 된다. 

바스키아를 표지모델로 쓴 타임지

몇몇 사람들은 이를 보고 앤디 워홀이 어린 흑인 화가 바스키아를 통해 다시 한번 대중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며 비 했다. 앤디 워홀은 항상 파격으로 대중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유명해져라. 그러면 네가 똥을 싸도 사람들이 열광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이 말을 앤디 워홀이 어디서 했는지, 정확하게 전해지는 증거는 없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유명세를 통하여 그동안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한 미(美)를 대중들에게 보이고 이것이 미라고 주장해왔다. 아무도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하던 어린 흑인 화가가 혹시 '유명한 앤디 워홀이 싸고 잘 포장한 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진 이들도 존재했다. (실제로 피에르 만초니는 자신이 직접 싼 똥을 통조림에 포장하여 <예술가의 똥>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앤디워홀과 바스키아

회화의 부활

바스키아의 드로잉들

장 미쉘 바스키아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앤디 워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전혀 가치 없었다면 앤디 워홀조차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회화'라는 독특함을 갖고 있었다. 아니 회화가 독특하다고? 당시의 미국 예술계는 피카소로부터 시작된 추상주의가 캔버스를 벗어난 상태였다. 마르셸 뒤샹을 중심으로 '레디 메이드' 열풍이 불면서 더 이상은 붓과 물감, 캔버스를 통한 회화가 주류 미술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회화 작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 회화 작가는 정통 회화와 현대 미술에 각각 한 발씩을 담그고 서 있는 듯했다. 

바스키아의 페인팅들

붓, 물감, 그리고 캔버스라는 정통적인 도구와 원색적인 색채를 통하여 그라피티나 팝아트에서 보여주는 추상화적인 심벌을 그린다. 그리고 그림에는 철학적 시구들이 그려진다. 분명히 본 것 같긴 한데, 새롭게 느껴지는 바스키아의 그림들에 많은 이들은 감명을 받는다. 사람들은 바스키아를 '검은 피카소'라고 부르며 찬사를 보낸다.


하위문화 그 자체

미국의 히피들

당시 미국은 '하위문화'가 가장 꽃 피웠던 시기이다. 하위문화는 기존 질서의 정당성과 주류문화의 가치를 의심하는 새롭고 이질적인 문화이다. 더 이상 전체주의적 생각들은 청년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청년들은 자신의 자아 발견을 중요시하는 반동적인 문화부흥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격식을 차리기보다는 자신이 입고 싶은 대로 입는 스트릿 패션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굳이 거처를 정해놓고 살지 않는 히피 문화를 나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 시작했다.

미국 하위문화의 주체들

이 문화의 주체는 사회적 약자인 흑인, 청년, 여자 등이었다. 바스키아는 하위문화 그 자체였다. 그의 피부색은 검었고, 나이는 굉장히 어렸다. 그의 그림에는 인종차별, 사회적 비판, 흑인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반항적인 그림은 하위문화를 완벽히 표현했다. 그는 하위문화 그 자체였고, 하위문화에 열광하던 당시 미국인들에게 가장 알맞는 화가였다.


후반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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