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학당'에서 두 철학자가 들고 있는 책,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웬만하면 다들 한 번씩은 보았음직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라파엘로 산치오가 교황 율리오 2세의 주문으로 27세인 1509~1510년에 바티칸 사도 궁전 내부의 방들 가운데서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 그린 프레스코 화이다. 아테네 학당에는 30여 명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그림의 가운데에는 붉은 옷을 입은 플라톤과 푸른 옷을 입은 아리스토 텔레스가 있다.
풀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을 보고 혹자는 플라톤은 이상주의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였다고 평한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이데아에 대해 이야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학을 중요시해서 그렇게 평가된 것일까?
그들의 손에는 각각 한 권의 책이 들려 있다. 플라톤의 손에는 『티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에는 『윤리학』이 들려 있다. 플라톤의 대표 저서로 꼽히는 책들은 『향연』, 『국가』,『법률』 등이다. 그럼에도 왜 『티마이오스』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각광을 받았던 그의 저서들은 자연과학에 대한 책들이었으며, 학문의 체계를 설립한 철학자로 여겨짐임에도 그의 손에는 『윤리학』이 들려 있다.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유럽에 전해지지 못할 뻔했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비(非) 기독교적인 학교에 대한 폐쇄 정책에 따라 아카데메이아는 529년에 폐쇄되었다. 그 때문에 그의 저작은 후대에 거의 전해지지 못했다. 기껏해야 몇몇의 텍스트만이 존재하는 정도였다. 비록 그의 철학은 플로니누스에 의하여 '신플라톤주의'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점차 기독교 신앙과 결합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간다. 플라톤의 원서들보다는 오히려 신학자들의 책들이 많이 읽히게 된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또한 마케도니아 왕국의 몰락과 함께 그리스에서 자취를 감춰버린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리스는 명목 상,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갖는다. 이 가운데 반(反) 마케도니아 주의가 생겨나면서, 마케도니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폐기시킨다. 이것은 마치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 일제의 잔재를 없애려는 시도와도 같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문책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하여금 철학에 두 번 죄짓지 않게 하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칼키스로 도망친다. 그리고, 그동안 리케이온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도 모두 폐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동방으로부터 유럽에 다시 소개된다. 알렉산더는 동방을 점령하면서 수 십 개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다. 알렉산더는 이 도시들에 그리스식 건축물들을 세우고,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을 이주시켜 살게끔 한다. 이 도시는 강력한 왕권 아래, 그리스식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에 자연스럽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저작들이 페르시아를 넘어 아시아 쪽까지 전해진다. 알렉산드리아들은 대부분 알렉산더 사후, 곧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인들,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은 여전히 그리스식 문화와 학문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이슬람 국가가 탄생한다. 그들이 세력을 넓힐 때 체재 강화를 위해 선택한 정책은 바로 '문화 융합 정책'이다. 이슬랑 국가들은 알렉산더처럼 무리하게 문화를 뒤바꾸기보다는 각 식민국가들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식민국가들에게서 읽히고 있는 책들을 번역한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만수르(재위 754~775)의 번역 작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고전들을 아랍어로 번역한다. 그 고전과 문화들이 7세기 이후 갑자기 그리스화 되어버린 동로마제국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이 문화들은 동로마제국이 몰락하고, 동로마제국의 학자들이 도시국가화 되어져 있던 북이탈리아 지방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다시 유럽으로 전해지게 된다.
먼저 전해진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었다. 특히나 이븐 루슈드의 주해는 유럽에 아리스토텔레스 열풍을 일으켰다.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굴해내어 중세 학문에 경종을 울린 안달루스의 대학자이며, 단테의 신곡에서 극찬을 받았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무슬림 학자이다. 자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 저작인 『자연학』과 『논리학』 등이 유행하였고, 처음에는 기독교 사상에 어긋난다고 평가받았으나 점차 신에 대한 이성적 접근의 방법으로 그의 학문들이 사용되었다. 또한 대학의 기본 교과목들을 만드는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플라톤이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유럽에서는 플라톤주의가 다시 유행을 타기 시작한다. 동방으로부터 피렌체로 여러 그리스 문헌들이 보내졌고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가 그것을 소장하게 되었다. 메디치는 플라톤의 저서들을 사랑하여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us Ficinus, 1433~1499)는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통하여 플라톤의 저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플라톤의 저서뿐만 아니라 『헤르메스 전집』이라는 책 또한 번역하여, 이전의 신플라톤주의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티시즘'을 유행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