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그림과 함께 읽는 글_떠 받으려는 소
안녕하세요. 호곤 별다방입니다. 호곤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노래가사(어린이날 방정환, 황소그림 중섭)에 나오는, 두 위인을 <방정환 글 이중섭 그림 호곤 엮음>으로 연결합니다. 어린이날의 창시자 소파 방정환과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대향 이중섭의 공통점은 어린이를 많이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아동문학가 소파(小波) 방정환 Bang Jeong-hwan(1899.11.09. ~ 1931.07.23. 향년 31세)
서양화가 대향(大鄕) 이중섭 Lee Jung-sub(1916.09.16. ~ 1956.09.06. 향년 39세)
소파 방정환의 소설, 그날밤은 상, 중, 하로 나뉘어 있습니다. 개벽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상〈1〉
상편 1920년 12월 1일 발행,《개벽(開闢)》제6호에서
중편 1921년 1월 1일 발행,《개벽(開闢)》제7호에서
하편 1921년 12월 1일 발행,《개벽(開闢)》제8호에서
여자에게서 온 편지 ──. 실로 영식이게는 생후에 처음이다.
첫 번 한 번 읽고는 읽고도 무슨 소린지 의미가 분명치 못한 것 같아서 다시 한 차례 읽고야 겨우 알았다.
그리고는 숨기지 못할 미소를 입 가에 띄우고 그 발그스름한 편지가 가늘고 작게 쓰여진 글자를 한 자 한 줄씩 글자 모양과 줄 바른 것을 주의하여 보며 문면에 나타난 것보다 더한 만족을 거기서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겉봉을 다시 집어 들고 어느 곳 몇 번지라고 어떻게 썼는가, 최영식 무엇이라고 썼는가를 보았다. 물론 시내 ××동 ○○번지라고 틀림없이 쓰고 최영식 밑에는 씨(氏) 자가 삐지게 똑똑히 씌어 있었다.
氏[씨], 氏[씨], 殿[전]자와 氏[씨]자와 그 쓰는 구별이 어떠한 것인가. 殿[전]자는 보통 편지에 으레 통상 쓰는 것이고(우리가 일찍이 쓰지 않던 것을 남의 바람에 멋 모르고 흔히 쓰지만), 氏[씨]자는 좀 친한 이에게 다
정하게 쓰는 것인가. 즉, 여자가 남자에게(사모하는 남자에게) 쓰는 친한 다정한 글자가 아닌가. 그렇다 하면 그가 그 구별을 생각하고 氏[씨]라고 쓴 것일까 혹은 그대로 쓰는 대로 별다른 생각 없이 쓴 것일까…….
무엇인지 그 殿[전]자 쓸 곳에 氏[씨]자를 쓴 그 氏[씨]자에 그의 친근하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견디지 못하겠다. 그러나 영식이는 그 氏[씨]자 좌측 옆에 친전(親展)이라고 쓴 두 글자를 보고 빙그레하였다. 전일에 친구에게서 온 것 중에 그리 대단치도 아니한 편지에도 친전이라고 특서 한 것은 종종 보아서 친전이란 그것이 그리 특유한 것이 아닌 줄로 생각하던 터인데 지금 생후 처음 여자에게서 온 편지에 쓰인 친전은 무언지 중대한 비밀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두 글자를 보고 그와 자기와의 사이가 퍽 친근할 뿐 아니라 아주 밀접한 것같이 느껴져서 아까 생각하던 氏[씨]자는 퍽 친한 터에 쓰는 글자로 쓴 것이라고 단정해 버려 만족한 기쁨이 전신에 넘쳐서 세상이 졸지에 이상(理想)의 평화, 행복의 세상이 된 것 같았다.
그는 편지를 들어 눈을 스르르 감으며 코와 입에다 대었다. 향긋한 향내가 가느름한 하게 코에 맡아진다. 그는 또 빙그레하고 입은 다문 채로 웃었다. 혼자 몸으로는 지탱치 못할 희열과 행복을 느낀다.
그 때 마침 사랑문 소리가 나고 창 밖에 신발 소리가 나므로 그는 깜짝 놀라 편지와 봉투를 책상 서랍에 급히 틀어 넣고 방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니까 어느 틈엔지 비가 시작되어 부슬부슬 오고 김(金)과 임(林) 두 사람이 검은 우산 하나를 받고 와서 섰다.
“방문을 꼭꼭 닫고 무얼 하나.”
하고 웃는 모양이 어쩐지 편지 보던 것을 아는 것 같게 염려가 되나 그대로,
“아 ─ 니 좀 드러누웠었지 ── 어서 올라오게. 비 맞고 섰지 말고…….”
하며 그네의 동작만 보았다. 자주 자기네 사랑같이 놀러 오는 그네는 목달이 구두끈을 풀고 기탄없이 방으로 들어가 털썩털썩 앉았다.
그네의 주머니에서도 담배가 나오고 영식이도 담배함을 내어 놓아 각기 한 개씩 피워 물고 두서없는 한담이 시작되었다. 이 말 저 말하다가 언뜻 김이 영식에게,
“에그 참! 자네 담배 그만 끊게…….”
“왜…….”
영식이는 담뱃재를 떨면서 반문하였다.
“허 씨가 자네 담배 먹는 것이 좀 흠이라고 하더라데…….”
영식이가 심중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허(許) 씨(편지한 여자)의 이야기가 기어코 나왔다. 영식이는 심중으로 퍽 시원하고 반가우면서도,
“허 씨라니…….”
하였다.
“아따 자네 좋아하는 허정숙이 말일세. 허정숙이가 누구를 보고 그러더라네. 자네더러 사람은 좋은데 담배를 먹는 게 좀 ─ 재미없더라고…….”
영식이는 참을 수 없이 기뻤다. 그리고 그가 어디서 언제 누구에게 그런 말을 어떤 태도로(아주 언짢게 했는지 좋게 좀 흠이라고만 부드럽게 했는지……)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런 여자가 더구나 어느 남자를 보고 그런 말을 할 리가 있나…… 자네들이 부러 하는 소리지.”
“아닐세 이 사람아. 왜 허하고 같이 주일 학교 교사 노릇하는 조 씨가 아니 있나? 그 조 씨가 이 사람에게(김 군을 가리키며) 어떻게 아주머니뻘이 돼서 자주 놀러 가거던 …… 바로 어저께 그러더라네. 그래서 이 사람이 듣고 왔거든…… 어쨌든 자네는 수 났네…….”
하고 옆에 잠자코 있던 임이 가장 침착하게 설명한다.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확실히 성미 깔끔하고 독신자(篤信者)인 그가 그런 말을 하였으리라. 그러나 과히 나쁘게 말은 아니하였겠지……하며 영식이는 머리 속에 성미 결백하고 행동이 얌전하여 여자끼리도 별로 교제가 적다는 얼른 좀 쌀쌀해 보이는 허를 그리면서 입으로만,
“나 담배 먹거나 안 먹거나 상관할 것 무엇 있나? 예배당에서만 안 먹었으면 그만이지…….”
(속으로 벌써 절대로 안 먹으리라 결심을 하고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게 말이지. 모르는 남자의 일에 상관할 바도 없고 더군다나 그의 성미가 여자끼리도 남의 말을 잘 아니하는 터인데 유독히 자네의 일을 그렇게 염려를 하니까 좀 ─ 으 ─ 수가 났단 말이지! 아닌가”
하면서 김이 임에게 협력을 구하는 듯 얼굴을 향했다.
임은 담배 연기를 천장으로 대고 휘 ── 뿜으면서,
“그래 ── 어쨌든 보통이라고는 볼 수가 없어 ── 그럴 듯도 한 일이 아닌가. 그도 미혼 처녀로 조금 있으면 노처녀라는 소리를 들을 터이고 그런 데다가 자네로 말하면 그와 한 취미인 음악가야. 또 남자 간에도 이름난 미남자야……. 거 어찌 안 그렇겠나 뻔하지.”
하는 소리에 김은 신이 나서 물었던 담배 불을 끄면서,
“그것 보아 내가 거짓말인가. 예배 볼 때에도 그렇지. 자네가 아니 오는 날이면 그가 두리번두리번 찾다가 영 아니 오고 없으면 풍금 탈 때에도 풀이 하나도 없이 타고 예배만 끝나면 즉시 바로 달아나지. 또 만일 자네가
풍금을 타러 나갈 때면 그는 고개를 푹 숙이느니 예배가 끝나도 그렇게 급하게 가지 아니하고…… 그게 다 ── 그래서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을 부인(否認)하듯,
“미친 사람들…….”
하고 픽 웃기는 하나 기실 영식이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퍽 기뻤다.
저들이 그 허에게서 내게 편지가 온 줄을 알면 얼마나 더 떠들까. 저렇게 들 이야기하고 있는 허가 보드라운 손으로 마음을 다하여 쓴 편지가 저들 앉았는 그 옆의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줄을 알면 저들이 얼마나 나와 허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떠들고 벌써 편지까지 오고 가는 나와 허와의 사이를 얼마나 속으로 부러워하고 시기할까……. 현재 그 허에게서 반가운 편지가 와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저렇게 떠들고 있구나 생각할 때에 영식이는 자기 몸의 한없는 행복을 깊이 느꼈다. 저들과 자기와는 원래 별다른 차이가 있는 인물인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만치 허와 자기와의 사이는 다른 제삼자가 엿보지 못하고 짐작도 못할 비밀하고 친밀한 사이라고 느껴진다.
지금 가장 예민한 관찰과 추측을 자랑하는 김에게 내게는 벌써 이렇게 편지가 왔다네…… 하고 내어 밀어 그가 벌써 편지까지 왔는가 하고는 놀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잠그지도 않은 저 서랍 앞턱에 있는 편지를 혹시 저네에게 들키면 어쩌나 하고 적지아니 겁이 나는 한편에 저네들이 장난을 하다가 무슨 동기로든지 저 서랍을 열어 그 편지가 있을 줄은 꿈도 못 꾸는 저의 눈앞에 드러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여보게 한 턱 내게…… 여자끼리도 교제를 잘 아니하는 그런 여자의 눈에 들고…… 한 턱 안 낼라나”
하는 김의 소리에 영식이는 참지 못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턱을 낼 일이 있어야 내지…….”
하면서 창문을 드르륵 열고 문지방에 턱을 고이고 혼자 무엇을 보고자 하는 것도 없이 바깥을 보고 있다.
날이 흐려서 어느 때쯤이나 되었는지 분간을 할 수 없다. 다만 가늘은 비가 그저 부슬부슬 내리고 처마에서는 낙수물이 똑똑 떨어진다.
상〈2〉
지루한 장마가 겨 ─ 우 지나고 요새는 화끈화끈하는 햇볕이 다시 내리쪼이기 시작하였다.
영식이는 그 지루한 장마도 지루한 줄도 모르고 매일 퍼붓는 비를 귀찮은 줄도 모르고 가장 재미있게 행복하게 지냈다 ──. 꿀보다도 무엇보다도 달고 재미있는 첫사랑의 속삭거림에 다른 일은 전혀 모르고 ──.
허에게 편지를 주고받고 하기 시작한 지 한 달 반쯤 되었는데 그동안에 허에게서 온 편지는 아홉 번이나 된다. 영식이가 허에게 한 것보다는 둘이나 적지마는.
금화 산록(金華山麓) 골바위 느티나무 밑 볕 안 드는 그늘을 골라서 돗자리를 집에서 갖다가 펴고 영식이는 앉았다. 그래도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햇볕이 헝겊 무늬처럼 얼룩얼룩 비치는데 그 조그만 볕이 얼굴에 동전짝만 하게라도 닿으면 뜨거운 인두를 가깝게 대는 것처럼 따갑다. 그는 사현금(四絃琴) 갑을 벼개로 베고 하늘을 쳐다보며 드러누웠다.
저녁 여덟 시가 퍽 지루하게 기다려진다. 여덟 시부터 청년 회관에 자선 음악회가 있는데 자기도 출연한다고 허에게서 어저께 편지가 온 까닭이다. 해는 아직 질 것 같지도 아니하고 따가운 볕이 돗자리 위해 듬성듬성 비친다. 드러누운 채로 팔목을 들어 양복 소매를 걷고 시계를 본즉 이제서야 다섯 시 반이 조금 지났다. 그는 담배가 먹고 싶었다. 영영 안 먹으리라 결심은 하였지마는 ──. 그 후에도 학교에서 누가 담배를 내어 주면 싫단 말아니하고 받아먹은 일이 서너 번이나 된다. 지금도 불현듯 담배 생각이 나서 없는 줄 뻔히 알면서 손이 양복 주머니로 들어간다. 역시 담배는 없었으나 들어갔던 손에는 편지가 쥐어 나왔다. 어저께 허에게서 온 아홉 번째 편지다. 몇 번이나 읽은 그 편지를 다시 내어서 글자 모양도 보고 내용의 구절구절도 보는 중 또 눈이 ‘2년 후 영광 있게 졸업 성공하실 날을 낙삼아 기다립니다…….’ 하는 구절에 머무르고 어저께 처음 보고 가지가지로 나던 생각이 또 되풀이해서 나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서 정해 놓은 것은 아니나 내 정혼해 놓은 여자가 있는 줄을 알면 결코 이런 문구는 쓰지 아니 하렸다. 그렇게까지 나를 믿고 있는 그가 지금이라도 내게 정혼한 여자가 있는 줄을 알게 되면 어찌하는가 단념하고 아는 체도 아니할까. 내가 굳이 속인 것은 아니지만 속았다고 원망할까. 울까, 욕할까. 아니 아니 결코 울지는 아니하리라. 속았다고 원망은 하겠지. 퍽 낙망하고 가슴 아프리라. 어쩐지 ‘내게는 정혼한 여자가 있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 여자 그 처녀 숙녀를 속이는 것 같아서 안 되었다. 그러나 실상 정혼한 것도 부모가 하신 것이지 내가 얼굴이나 보았을까 성질이나 알까……. 정혼해 놓은 것도 부모의 일이고 그 여자를 학비를 대어 주어 고등 여학교에 통학하게 하는 것도 부모의 일이고 나중에 후회할 것도 부모의 일이지 나는 그 일에 좋으니 그르니 의견 한마디 말한 일 없이 모르는 일이니까 내가 반드시 그와 동거하지 안 하면 안 될 의무도 없고 당자인 내가 그 혼인을 파혼하고 다른 곳으로 간대도 내 죄과일 것은 조금도 없으니까……. 무슨 죄악일까. 만일 허가 그 일을 알게 되거던 나는 사실대로 그것은 내가 정혼한 것 아니니까 당자가 부인하는 이상 어디까지 든 지 그것은 헛일일 것이요, 나는 진정으로 전 사랑을 당신에게 바친다고 말하리라. 오직 내게는 당신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리라. 그러면 그가 어떠할까…… 내 말을 믿겠지! 아니 그래도 불안은 용이하게 없어지지 안 하렸다. 혹은 어쩌면 내 말이 얼러맞추는 수작이라고 하지 아니할까. 참말로 나는 지금 정혼했다는 데는 아무 뜻이 없는데……. 언젠지 학교에 가는 것을 길에서 그인 줄로 알고 보니까 얼굴은 괜찮더구만 성질이 어떤지를 아나 취미 희망이 무엇인지를 아나 , 결혼은 반드시 연애로써 성립되어야 하고 연애는 반드시 이성의 합치라야 진실한 연애라 한다는데……. 2년 후 졸업할 날 그렇다! 그 안에 파혼이 되도록 하리라. 결혼 생활을 하다가 이혼을 하여 보내는 것도 아니고 그 여자에게 아무 결(缺)될 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2년 후 그때까지 스물셋 인 허가 기다려 줄까. 조금 가면 아니 벌써부터 헌 사람에게는 노처녀라는 소리를 듣는 그가 자기보다 두 살이나 아래인(허는 아직 내 나이를 모르지마는) 내가 햇수로 3년이나 후에 졸업할 때까지 일 없이 기다려 줄까. 그동안에 그의 부모가 강제로라도 시집을 보내렸다, 아니 아니 그래도 그는 다른 여성보다도 더 몇 갑절 깔끔하고 단단한 성격을 가진 그는 2년 3년이라도 꼭 기다려 주리라. 그는 편지를 머리맡에 놓고 양복 웃옷 속 주머니에서 포켓 일기를 꺼내더니 그 일기책 갈피에서 허의 조그만 사진을 꺼내 들었다. 왼쪽 이마에서 갈린 검은 머리가 바른쪽 눈썹을 거치고 지나 귀머리로 살짝 지나간 트레머리
에 조금 갸름한 흰 얼굴을 조금 숙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게 천연히 들고 크도 작도 안 한 부드러운 코 밑에 입술을 여무지게 다물고 잠잠히 무엇인지를 주시하고 있는 조용한 그 모양. 지금 그가 가늘고 부드러운 애련한 듯한 소리로 ‘저는 영구히 당신의 것입니다. 졸업하실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는 잠잠히 초연히 섰는 것 같다. 어쩐지 사진에 뵈는 그가 애련한 자태로 자기의 졸업을 독촉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느길 때에 그는 희미하나마 일종 불안과 공포가 가슴속에 환영(幻影)같이 나타나는 것 같았으나 즉시 빙그레하는 미소가 그의 입 모습에 떴다. 그리고 그는 그 사진 든 손을 하늘을 보며 드러누웠는 가슴 위에 놓았다. 물론 사진의 낯이 포근한 양복 세루와 마주 닿았다. 손은 그 위를 덮고……. 그는 눈을 스르르 감고 흰 적삼 검은 치마 입고 피아노 앞에 앉을 허를 생각하며 누웠다.
“영식이 ── 혼자 와 있네그려 ──.”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사진과 편지를 급히 주머니에 넣으며 보니까 동네에 있는 친구 중에 가장 침착한 성질인 임이 모자도 안 쓰고 둥근 누런 부채를 들고 비탈진 길로 올라온다.
해가 많이 지고 겨우 어둡기 시작하였다. 빙수 파는 구루마에도 빙자(氷字) 쓴 등불이 달리고…….
영식이는 일곱 시쯤부터 서대문 우편국 앞 전차 종점 근처에서 이때까지 어름어름하고 서 있다. 세 ─ 루 양복 말쑥하게 입고 원래 희고 고운 얼굴에 면도까지 새로 하고 그 위에 맥고모자를 산뜻하게 사뿐 얹어 쓰고 허가오기를 기다린다. 그와 여기서 만나자는 상약(相約)은 한 일이 없으나 공연히 마음이 내키어 혼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줄은 그가 알면 부끄러울 겁도 나면서……. 모화관 쪽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많으나 허는 보이지 않는다. 문 안에서 나오는 전차는 사람을 가득가득 싣고 나와서 또 가득가득 싣고 들어가기를 벌써 10여 번째나 하였다. 야시(夜市)에 가는 사람들인지 연극장에 가는 사람들인지 전차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서 있고 그중에는 악박골 물터에서 돌아가는 물병을 든 부인도 있고 기생도 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기생을 보는지 모여선 군중을 보는지 고개가 틀어지도록 보고들 간다. 꽤 어두워졌다. 전차가 또 나왔다. 가득 탔던 승객들이 내리기도 전에 발등을 디디어 가며 몰려 타더니 그래도 10여 명이나 못 타고 떨어져서 다음 차 오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감옥 출장소 앞에 예상하던 바와 같이 흰 적삼에 검은 치마를 입고 영식이가 여기서 기다릴 줄은 짐작도 못하고 허가 내려온다. 영식이는 가슴이 무엇에 놀랜 것같이 섬뜩하였다. 그러나 얼른 붉은 전등 달린 전주 밑 전차 기다리는 사람 틈에 끼어 서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섰는데 허가 왔다. 그러나 그 군중 틈에 영식이가 있을 줄은 알지 못하는 허는 전차가 아직 아니 나오고 사람은 많고 하니까 군중과는 조금 떨어져서 혼자 얌전하게 악보를 손에 들고 섰다. 영식이의 가슴은 도수(度數)도 없이 뛴다. 저의 옆으로 슬쩍 지나갈까 그냥 모른 체하고 있을까 헤매는데 전차는 또 가득이나 싣고 나왔다. 전차의 정차하는 그 옆으로 모여드는 군중과 함께 영식이도 되도록 허와 만나도록 뒤떨어져 전차 승강구로 다가섰다. 허도 맨 나중에 다가서다가 영식이를 보았다. 갑자기 붉어지는 얼굴을 숙여 누가 볼까 봐 언뜻 인사를 하였다. 영식이는 누가 볼까 겁하여 맥고 끝에 손 끝을 댈랑말랑 하고 고개를 잠깐 숙여 인사하였다. 무언(無言)! 영식이가 승강구 손잡이를 잡고 서서 허에게 올라타라는 뜻을 표하였다. 허는 허리를 잠깐 굽히는 듯하며 먼저 타시라는 뜻을 보이더니 얼른 올라탔다. 영식이도 뒤따라 올랐다……. 벌써 만원이었다. 간신히 허만 차 안으로 들어서고 영식이는 차장대에 섰더니 차장이 자꾸 들어가라 하므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섰다. 그러는 동안에 전차는 떠났다. 쫓아 타려는 노파 하나를 본 체 만 체하고……. 만원이라 복잡한 틈에 억지로 끼인 영식이와 허의 몸은 한데 닿았다. 어디선지 훈훈한
바람이 일어나 얼굴에 와 부딪고 따스한 그의 체온이 몸이 맞닿은 그리로부터 자기 몸에 옮아오는 것을 느낄 때에 가슴은 제어할 수 없이 울렁거린다. 그는 벌써 취한 사람같이 멀건 ── 하다. 차장이 와서 차표 내라는 소리에 어떻게 하여 좁은 틈을 부벼대고 차표 두 장을 떼어 주니까 한 분은 누구냐고 물으므로 턱과 눈으로 허를 가리켰다. 그랬더니 차장이 아무 말 없이 차표 한 장을 도로 주며 빙그레 웃는다. 영식이의 얼굴은 옆에 사람 민망하게 빨개졌다. 그러나 그나마 허가 돌아섰기 때문에 그 꼴을 보지 못하여 다행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차는 벌서 흥화문 앞 구세군영을 지난다. 내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 좁은 데 기생 하나가 또 올라 비집고 들어섰다. 영식이는 허와 기생 틈에 바싹 끼게 되었다. 기생의 몸둥이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까닭 없이 그것이 싫어서 고개와 몸을 돌려 허를 향하였다. 더한층 허의 몸이 신성해 보인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 영식이는 무릎을 꼿꼿이 펴고 허와의 키를 대어 보았다 검은 그의 머리가 코에 닿는지 눈에 닿는지 한다. 꼭 합격하는 소리가 속에서 나다 말았다. 영식이는 가만히 서서 다른 데로 향할 곳 없는 눈을 허에게로 쏟는다. 손잡이 가죽끈을 붙들고 섰는 그의 팔뚝은 전광(電光)에 비치어 희다 못하여 창백하게 보인다. 통통하고도 걀쭉걀쭉한 옥 같은 그 손과 그 손 끝에 반짝반짝 빛나는 희고 맑은 손톱, 저 어여쁜 손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춤을 추리라 생각하며 물끄러미 볼 때에 복스럽게 부드러운 손을 가진 그가 퍽 행복스러워 보인다. 깔끔한 성질을 설명하는 듯한 조금 파리한 듯한 그 턱에서 귀 밑까지의 티 없는 맑은 살과 보기에도 서늘한 적삼 동정에 싸여 희고 맑고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가슴 위 살을 부러운 듯이 들여다보고 있는 영식이는 취하고 취하여 정신 잃은 사람 같았다.
전차는 어느덧 종로에 닿았다. 한 사람도 중간에서 내리지 아니한 승객은 의논한 듯이 모두 내렸다.
허의 뒤에 10여 보쯤 떨어져 서서 불빛 불그레하고 사람 와글와글하는 야시(夜市)를 눈떠 보지도 아니하고 청년회로 들어갔다 ──. 허는 악사석(樂師席)에 영식이는 일등석 중에 앞턱 가깝게 앉았다.
아홉 시나 가까워서 개회는 되었다. 순서는 진행되어 간다.
허의 피아노 독주도 무사히 마치고 밤이 깊어서 폐회되었다. 막혔던 물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는 군중 속에 끼여 나온 영식이는 전찻길 앞 버드나무 밑에 서서 허의 나오기를 기다려 올 때와 같이 10여 보쯤 떨어져서 걸어 역시 만원 되어 복잡한 전차를 타고(그러나 이번에는 간신이 자리를 얻어 앉아서) 새문 밖에서 내려서 모화관까지 가기는 동행하게 되리라. 동행을 하게 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하리라는 결정도 나지 못해서 전차는 종점에 닿았다. 우둥우둥 일어서서 좁은 문으로 차례차례 내릴 적에 영식이는 의외에 형(사촌형)을 만났다. 한차에 타고 오 면서도 승객이 많아서 몰랐던 것이다.
“어디 갔다 오세요.”
“배오개 좀 다녀온다. 구경갔다 오니/”
“아 ── 니요.”
하며 둘이 전차에서 내렸을 때에는 허는 주춤주춤 하다가 벌써 7,8보쯤 간다. 누구 만난 줄로 알았겠지…… 별로 하는 이야기도 없이 갑갑해하는 생각으로 형보다 앞서지 못하고 가면서 돌다리에서 꺽이기까지 흰 적삼, 검은 치마의 뒷모양을 희미하게 보면서 걸었다. 그가 꺽인 넓은 골목을 형과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 들어보았으나 그는 벌써 보이지 않고 희미한 길 끝에 천연정(天然亭)이 검게 우뚝히 보일 뿐이었다.
밤은 깊다.
상〈3〉
보름쯤 지났다. 편지가 네 번이나 오고 가고 삼복으로 기어가는 여름날과 함께 둘의 사이는 나날이 뜨거워져서 거의 백열에 이르렀다. 영식의 허를 죽도록 사모하는 정은 자칫하면 제 힘으로 제어치 못할 인간 본능의 불길에
탈 듯 탈 듯하다. 그러나 영식이는 어디까지든지 연애의 신성을 믿었다. 그
신성을 존중하였다.
이 곳 저 곳에 청년회가 일어나고 교회마다도 청년회가 신성(新成) 혹은
부흥되어 올여름에는 변(變)으로 강연회와 음악회가 많다 ──. 오늘도 어
느 엡웟 청년회 주최의 음악회가 종로 청년 회관에 있어서 음악회라면 빠지
는 일 없는(서로 알게 된 후부터 더욱) 허와 영식이는 음악회를 보고 누르
끼레한 시계 비치는 경찰서 앞을 전후하여 걸어 전차에 올라 앉았다. 허의
맞은쪽 줄에 앉았는 학생 몇 사람과 순경 두 사람이 시선을(허 외에도 트레
머리 여자가 두 사람이나 있었건마는) 허에게로만 쏟는다. 영식이는 알지
못할 만족과 행복을 느꼈다. 세인(世人)이 못 갖는 귀진품(貴眞品)의 소유
자 같은 기분으로 ──. 여러 가지 사람의 여러 가지 심중을 태운 전차는
반도 신문사 앞을 지나 야주개(당주동)를 지난다. 영식이는 또 이런 일을
생각한다.
‘오늘도 으레 종점까지 아니 가고 새문턱에서 내리리라. 그래서 그와 나는
성 밑 컴컴한 길로 기탄없이 이야기를 하며 가리라. 행인도 없는 길로……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가 나오려나……. 오오 내가 그 이야기를 할까. 그가
말을 먼저 내겠지…….’
어느 틈엔지 차는 흥화문 앞을 지나 새문턱에 닿았다. 차장이 말리는 것을
모른 체하고 영식이는 뒤로 내렸다. 사람 없는 적적한 길에 내리자 차는 다
시 잉 ─ 소리를 내면서 닫는다. 보니까 허는 벌써 앞으로 내려 있었다.
처음 이 길로 가게 될 때에는 영식이가 ‘이 길은 몹시 컴컴합니다.’ 하
면 허는 ‘좀 컴컴은 해도…….’ 하면서 웃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아무 말
도 없이 허가 성 밑 비탈길로 올라가고 영식이는 보호자같이 그 뒤를 따라
올라간다. 전당국(典當局) 대문 전등을 지나서면 성 밑의 길은 퍽 캄캄하였
다. 그 캄캄한 곳을 걸어가게 되자 둘 사이의 간격은 퍽 가까워졌다.
“오늘 그 붉은 옷 입고 키 큰 서양 부인의 피아노 독주는 퍽 재미있지
요”
허가 캄캄한 앞만 보고 가면서 말했다.
“애 ── 좋더군요. 그러나 오늘 나는 맨 나중에 경성 악대의 조선 고가
(朝鮮古歌)가 좋더군요. 양악(洋樂)으로는 처음 듣는데…….”
“예, 좋긴 해도 무슨 소린지를 몰랐어요.”
“그게 방아타령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좋지 않아요? 방아타령이라니까 속
되고 야비한 것같이는 들려도‥‥‥.”
하고 영식이가 설명처럼 말하니까 허는 역시 앞만 보고 가면서,
“조선 노래도 말이 야비하고 천해 그렇지, 곡조는 좋은 게 많은 모양이예 요.”
한다.
“예 ──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술집 많은 곳을 지난다. 좌우에 늘어 있는 순대국집에는 지금도
흥정이 좋아 집마다 5, 6명씩의 노동자, 어떤 집에는 관청 하인 같은 양복
쟁이 두엇이 술잔을 들고 떠들고 있었다. 그네는 이 길로 여자가 지나가거
나 무엇이 지나가거나 술밖에는 알 바 없었다.
허와 영식이는 국 냄새 나는 그 곳을 얼른 지났다. 다시 컴컴한 속을 걷게
되었다. 어둠 속에 더욱 우중충한 독일 영사관 옆을 지날 때 허가,
“그런데 참 여쭤 보려던 것이 있어요.”
하고 돌연히 꺼냈다.
“예? 무엇입니까?”
“저……요새 안 것인데요‥‥‥.”
퍽 주저한다.
“무엇 말씀입니까? 제 이야기예요?”
“조금도 무슨…… 저 ── 제가 드린 편지나 사진이나 다 ── 될 수 있
으면 도로 주시던지, 주시기 원치 않으시면 태우시던지…….”
의외의 말에 놀란 영식이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왜요! 왜 그러십니까? 예?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 하십니까? 예”
허는 겉으로 보기에 퍽 태연히 걸어가면서,
“제가 편지로나 말씀으로나 하시는 말씀이 모두 진실이예요? 예? 모두 허
위 아니예요?”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럼 정숙 씨께서 제게 하신 것도 모두 거
짓입니까”
“아 ── 니요.”
“그럼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엇에서 허위를 발견하셨습니까”
“저 ── 들으니까. 야, 약혼하신 이가 계시다구요.”
하면서 여전히 고개를 까닥도 아니하나 걸음은 좀 느리게 걷는다.
‘기어코 나왔구나.’
영식이는 속으로 부르짖고도,
“누가 그래요.”
하고 걸으면서 허의 얼굴과 입을 옆으로 보았다. 조금 안으로 숙인 듯한 고
개, 흰 얼굴, 가는 목, 그가 연한 여성으로 일종 질투의 정에 속을 태우는
것이로구나 하고 볼 때에 더 한층 곱게 맑게 처녀답게 연하게 보인다.
“저는 그렇게 누가 그러더라는 말까지는 아니해요. 누가 그랬던지 사실은
사실이지요.”
“어느 때든지 말씀을 자세히 하려던 것입니다.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러
나…….”
그러나 하는 그 뒷이야기가 허의 가장 듣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연
동으로 가는 큰 길로 나갈 길은 벌써 지나쳤다. 둘이 다같이 벌써 큰 길로
나가게 된 것은 애처러워하였다.
조금도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야기를 마저 하고 가시지요.”
영식이 말에 동의를 표하는 듯의 허는 잠잠히 있었다. 두 사람은 큰 길로
나갈 길을 제쳐 놓고 그대로 가던 길로 다시 계속하여 걸었다. 벌써 그것은
방향 없는 걸음이었다. 둘은 누가 가잔 말도 한 일 없이 독립문으로 가는
길을 내어놓고 그 옆으로 놓인 조그만 길을 걸어 사람 없는 성 밑 월암(月
巖)바위 위로 갔다. 세상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멀리 감옥소 안에 높은 전
등불이 보인다. 영식이는 흙 없는 바위 위에 앉았다. 허는 나중에 거기서
조금 뒤로 떨어져 조그만 소나무 옆 잔디에 앉았다.
인적도 없건만 영식이는 가는 소리로 낮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허의 앉은 곳은 높고 좀 간격이 떨어져서 잘 들리지 않는다.
“잘 안 들립니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다기 이 소리를 듣고,
“안 들려요?”
하면서 벌떡 일어나 주춤주춤 올라와 어름어름하다가 허의 옆에 엉거주춤하
고 앉았다. 영식이는 재주와 수단을 다하여 허가 충분히 알아듣도록 자기
의사로 정혼한 것이 아닌 이상 어느 때까지든지 그 정혼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 것을 거듭거듭 말하고 허가 중간에 무슨 말을 낼 새도 주지
않고 뒤를이어,
“결혼은 반드시 연애로써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연애는 반드시 이성의
합치라야 됩니다. 나는 정숙 씨를 이 점에서 사랑하며 나의 전부를 바칩니
다.”
고 몇 번이나 거듭거듭 말하였다. 엉거주춤하고 앉았던 영식이는 어느 틈엔
지 편하게 털썩 앉아 있었다. 허는 만족한 모양이다. 전부를 다 ── 안 모
양이다. 영식의 심중을 샅샅이, 그리고 튼튼히 믿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처음 그런 소리를 듣고야 어디 그래요”
만족을 얻은 후의 허의 말은 이러하였다.
“그러나 일면으로 보면 그런 불안, 의혹, 시기가 중간에 생겨서 그 연애
는 더 강하고 더 뜨겁고 더 깊어가는 것입니다.”
허는 잠잠히 있었다. 그러나 입에는 미소를 띠고…… 두 사람은 묵묵, 밤
은 적적, 한참이나 있다가 영식이는 그만 내려가리라 생각하면서 무언지 내
려다보며 잠잠히 앉았는 허의 옆 자태를 본다. 무심하게…… 흰 뺨 위에 검
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영식의 가슴
은 점점 무심해진다. 그 때,
“아이고 밤이 깊으니까 그래도 산들산들한 것 같아요.”
“왜 추우세요?”
하고 때아닌 소리를 물으며 영식이는 전신이 오싹하고 전기에 찔리듯 찌르
르함을 느꼈다.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친다. 저의 바른손은 늘 부러워하던
통통하고도 갸름한 피아노 잘 타는 흰 손목을 쥐고 있었다. 웬일인지 허는
손을 잡힌 채로 고개만 외면을 하고 가만히 있었다. 보드럽고 따뜻한 그 손
목으로서 옮아 오는 따스 ── 한 기운을 느낄 때에 그의 머리는 다만 황홀
할 뿐이었다. 그는 다시 왼손을 가져다 쥐고 있는 손을 어루만졌다. 뛰던
가슴은 조금 쉰 듯하다. 그 손을 놀 마음은 물론 지금도 없다. 그러나 제
낯으로나 본능으로나 그대로 쥐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는 벌써 본능이니
무엇이니 알지 못하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내어 버려 두는 그 손
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조금 바싹 다가앉으며 바른손으로 그의 뒤를 뻗어
그의 ○○○○를 ○○○○다. 그는 역시 ○○○다. 가슴은 도수 없이 뛸 때
로 뛰고 머리와 얼굴이 화끈화끈한다. 그는 그대로 한참이나 가만히 앉았
다. 몸이 무엇에 눌린 것처럼 덥다. 그는 바삭바삭하는 검은 머리가 자기
턱에 간지럽게 닿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미처 그의 더운 가슴이 벌럭
벌럭 뛰는 것을 알았다.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벌써 본능에 정복되고
말았다. 그는 벌써 연애니 신성이니 인생이니 우주니 알 바가 없었다. 머리
가 어디 붙었는지 상관없었다.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 손을 길게 뻗어 그의 ○○○○를 ○○다. 아
무○○도 아니한다. 본능과 본능이 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밤은 깊어 간다. 바위도 자고 소나무도 자고 세상이 모두 자는데 이 밤의
비밀을 알기는 오직 오직 창공에 졸린 듯이 깜박이는 별뿐이다.
중〈1〉
아아 무서운 죄악의 그 날 밤! 왜 내가 그런 일을 하였던가…….
불의의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식의 가슴에 머물러 있어, 그를 고민케 하였
다. 순결, 신성, 그것이 모두 지금의 영식에게 전혀 헛문자였다. 자신에도
의외인 그날 밤의 행사가, 그 찰나까지 그를 존귀히 알고 믿고 또 위하던
신성의 보옥을 소호의 여지도 없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시커먼 먹으로 함
부로 흐려 버린 것이다.
어째서 그런 나답지 않은 마음이 생겼을까……. 어떻게 내게 그런 야비한
짓을 할 마음이 생겼었을까…… 기어코 나는 비열한 자이고 말았다. 하등류
(下等類)였다.
농담 잘하는 김 군이,
“흥, 그 피아노의 녹신녹신한 섬섬 옥수를 턱 잡고……. 흥 참 행복자일
세.”
하며 비웃는 편보다도 부러운 듯이 떠들 적에 자기는 농담인 것도 잊고, 몹
시 그를 천시하였다. 저런 사람이 이성을 접하면 반드시 그 손목을 잡고 별
별 추행을 하리라 추상하고 내심으로 그가 자기의 벗임을 잊은 것같이,
“에이! 더러운 놈.”
하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남자들이 이렇게 모이면 여자의 소문을 이렇게
하고, 이런 야비한 소리를 하면서 웃고 떠드는 줄 알면, 그런 여자가 남자
를 어떻게 생각을 할꼬……하고 일종 가벼운 공포를 느꼈다.
어느 때는 여럿이 모인 틈에서, 남자들은 모이면 여자의 이야기를 저렇게
태연히 떠드는데, 나는 너무도 남자로서는 약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도
하였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한하여선 내가 그게 웬일이었을까? 세상에 그
일이 들춰날 때에 사람들은 얼마나 야만시할까. 얼마나 비열한 자라고 치소
할까……. 그렇게 되는 날 나는 무슨 낯을 들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에는 영구한 비밀이 없다 하는데 이 일에 한하여 영구히 드러나지 말라
는 법이 어디 있을까. 아아 ── 남이 알게 되는 날 어떻게 무슨 낯을 들란
말이냐. 남은 그만두고 우선 집에서부터 어쩌랴 ──. 영식은 그런 일을 생
각할수록 머리가 무겁고, 희미해지고, 앞일이 아득하였다. 그는 때때로 그
고민 속에서 헤어나오고자 하였다.
지나간 일은 다시 좌우치 못할 것이거니와 선후책으로야 종전의 결심대로
자기가 허에게 말로나, 편지로나 말한 그대로 학교를 마치기 전에 지금 약
혼 중인 것을 파혼을 하고, 허와 자기와의 결혼을 부모가 허락하시도록 주
선하면 그만이라 하였다. 비밀이야 허와 내가 입 밖에 내지 아니하는 이상,
결코 발로될 리는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런 생각으로 자기를 심한
번민 중에서 구해내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피하지 못할 절대 책임과
어떻게든지 허의 일신 일생을 잘 주선하여야 할 절대 의무를 싫거나 좋거나
짊어지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에는 무엇인지 무겁고 캄캄한 느낌이 머리를
흐리고 흐리고 하였다.
이상한 일로는 자기가 약혼한 것이 아닌 이상 반드시 결혼, 동거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여, 그와 파혼을 하고 허와의 결혼에 허락을 얻도록 하리라
던 결심이 약해진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심려였다. 지금의 자기에게는 그
렇게 하는 수밖에는 조금도 다른 길이 없는데, 아무리 애를 태워도 완엄한
부모의 앞에서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젊은 애들은 하나도
쓸 놈 없더라.’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말 안 듣고는 되는 놈이 없느리
라.’ 늘 이런 말씀을 하던 것이 지금 와서는 더 어렵고 무겁게 울렸다.
“왜 이녀석아, 하라는 공부는 아니하고 동네 여학생을 쫓아다니니? 벌써
색시를 정해 놓고 학비까지 대어 주는데 색시 집에서 들으면 좋아하겠다.
왜 그 하는 일 없이 트레머리에 모양이나 내고 예수교 같은 데로 사내나 후
리러 다니는 년을 왜 쫓아다니니? 아니긴 무엇이 아니야. 편지질을 밤낮 한
다는데 너의 애비가 그런 줄 알아보아라. 너를 지금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네가 트레머리한 계집애하고 맞붙어 다니는 줄 알면 가만 둘 듯 싶으냐”
하고, 어디서 누구에게 들은셨는지, 조모님이 이렇게 하시는 말씀에 그는
너무나 의외의 일에 놀랐다.
“누가 그래요?”
“누군 누구야. 저 이웃집 형이 보았다더라. 밤이 이슥했는데, 네가 그 계
집애하고 나란히 서서 아래 덕국 공관(독일 영사관) 골목에서 나오더라드구
나. 미장가 전 녀석이 그게 무슨 짓이냐. 그년은 무슨 계집이길래 남의 집
장가갈 신랑을 꼬여 가지고, 밤새도록 끌고 다니니……. 너 이 다음에 또
그런 소리가 들려 보아라. 네 아비에게 일러서 아주 집에를 못 들어오게 하
든지, 방에다 꼭 가두고 나가지를 못하게 하든지 할 테니…….”
“누가 그런 보지 못한 소리를 잘 해요. 윗집 형은 왜 일수나 잘 받으러
다니라지, 제 뒤 쫓아다니래요? 본 소리 못 본 소리를 모두 어른께 여쭙
고…….” 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옆에서, 옷 꿰매시던 모친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는데 듣지도 아니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만,
“저런 녀석 보게!”
하는 조모님의 소리만 뒤로 흘려 들었다. 그 후에도 조모님과 모친은 자주
그런 말씀을 하였다. 그럴 적마다 영식이는 밖으로 나와서 친구의 집을 찾
아가서 늦도록 놀다가 돌아왔다. 집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 불쾌하여 나온
영식이는 친구 틈에 가서 자네는 행복자일세. 처복이 좋으이 하거나, 혹은
흥, 두 음악가가 턱 결혼을 해가지고 양옥집 하나 조그마하게 짓고, 조석으
로 내외가 하나는 피아노 타고, 하나는 사현금 타고…… 그런 팔자가 어디
있냐……, 하고 부러운 듯 조롱하는 소리에 도리어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전보다 더 몇 갑절 부친의 눈이 무서웠다. 혹시 그 일을 벌
써 알고 계시지나 아니한가 싶어 방금 그 말씀을 꺼내시지나 아니하는가 하
여 될 수 있는 대로 부친의 앞을 피하였다. 그럴수록 번민은 점점 더해 가
고 집 안에 있는 것이 전혀 뜨거운 냄비에 콩 볶는 것 같았다. 세상 아무
곳을 향하고 찾아도 자기의 번민을 알고 동정하여 줄 사람은 허 한 사람밖
에 없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가……. 그 밤 후 영 ── 3주일째 되도록 만나지
아니한 영식이는 허의 일이 몹시 궁금하였다. 친구들이 일요일 오후에 와
서,
“자네 오늘 왜 예배보러 아니 왔었나. 허가 몹시 자네를 찾데.”
하는 걸 보면, 그는 그 후에도 예배당에는 여전히 잘 다니는 것이었다. 그
러나 자기는 만나서 어찌하나 , 무어라 할까 하여 공연히 마음이 조이고 가
슴 뛰어서 일체 가지도 않았다. 편지도 무어라고 어떻게 쓸는지 몰라 영영
아니하고, 3주일째 되도록 그대로 있었다. 허는 지금 어떻게 지내나…….
몹시 금시에 가 보고 싶도록 궁금했다.
3주일째 지나고, 그 다음 월요일 아침에 책보를 끼고 대문을 나서다가 우
편 배달부와 맞닥뜨렸다. 그 손에 들린 분홍빛 양봉투를 보고, 그는 벌써
허에게서 오는 것인 줄 알았다. 배달을 받은 것은 봉투 외에 조그마한 소포
도 있었다. 소포도 허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상하여 소포를 먼저 펴 보니
까. 《나의 화환》이라는 서양 시(詩)의 어여쁜 책이었다. 길을 가면서 편
지를 뜯었다. 무어라고 쓰기가 거북하여 이때껏 아니하였는데 그는 무어라
고 썼을까 하여 궁금하였다. 보니까, 내용은 길어도, 그 밤에 관한 것은 그
림자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전의 편지와 별로 다르지 아니하였다. 오늘 아
침 예배에도 안 오셨기에 궁금해서……, 라는 구절은 있었다. 아무 소리도
쓰여 있지 아니해서, 그는 마음이 놓였다. 딴은 그에 관한 일은 조금도 쓰
지 말고 모른 체하고 평상시같이 썼으면 그만일 것이다 하였다.
중 《2》
그 다음 일요일이었다. 영식이는 오래간만에 예배 참례를 하고 왔다. 예배
시간 전에 사무실에서 허와 맞닥뜨렸을 때, 그는 전력을 다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차리고 잠시 인사만 하였다. 그래도 남이 보는데 얼굴이 붉지나
않았던가 하여 염려되었다. 허는 아주 태연하여 보였다. 그의 그렇게 태연
한 태도가 도리어 기뻤었다. 인사는 극히 평범하게 끝났다. 아무도 그 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 이상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이는 없었다. 거기 섰
는 허가 이미 처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생각하던 것보다 퍽 평범
하게 쉽게 일없이 허와 만났고, 헤어지고 예배도 무사히 보고하여 영식이
마음은 저으기 편하여졌다. 허와 그의 친구, 조가 나란히 무슨 이야기인지
속살대며 예배당 문 밖 어귀에서 꺾이는 것을 보고 나서 영식은 김과 임을
사랑으로 들여보내며,
“내 옷 벗고 나옴세.”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웬일인지, 오늘은 부친이 이 때까지 집에 계시다.
자기 방인 아랫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고 다시 사랑으로 나가는데,
“영식아!”
하고 부친이 부르시므로,
“예.”
하고, 대청으로 향하였다.
“이리 올라오너라.”
무슨 일일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마루 위로 올라가 섰다. 두려운 부친의
눈이 얼굴을 몹시 보더니,
“너 거기 앉아서 이것 좀 읽어라. 무슨 소리인지.”
하고 내미시는 것을 보니까, 의외의 그것은 허에게서 온 편지였다. 몸이 오
싹하였다. 머리가 쭈삣하였다.
무슨 벽력이 내리려는가. 그는 벌써 고개를 들 힘이 없었다. 두 손길을 마
주잡고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왜 안 읽어.”
뇌성같이 부친의 음성은 울렸다. 영식은 깜짝 놀랐다. 부친의 말씀은 계속
되었다.
“하라는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없이 돌아다니며 계집질이나 하고, 이놈
누구냐, 이 편지한 계집이 누구냐, 뉘 딸이냐 말해라. 혼처까지 정해 놓고
얼마 안 있어 장가를 갈 놈이 학교에 다닙네 하고 계집질이나 하고……. 누
구야, 그게 뉘 딸이냐 말해라 이 놈. 일전부터 그런 말이 들리더라만 그래
도 그놈이야 아직 어린 놈이 설마 하였더니, 아까 웬 다홍빛 편지가 오기에
무엇인가 하고 보니까, 이놈아 그게 모두 무슨 소리냐, 사모하는 건 다 무
어고 사랑이란 다 무어야. 공부 아니하고, 그런 것 배우라디? 이번 일요일
에는 꼭 오시라고? 왜 네가 없어 예수를 못 믿겠다더냐? 가지고 오너라. 편
지 온 것 다 가져와 어서.”
영식이는 지금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파혼이야기도 지금 해야겠
고, 허와의 이야기도 지금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계집이니, 무어
니 하고
머리에서부터 잡된 명사를 붙이니,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내다가는 어느 지경
까지 갈는지 몰라서, 이리도 저리도 못하고 다만 머리와 가슴이 무겁고 캄
캄할 뿐이었다.
“가져와!”
또 뇌성같이 울렸다.
“왜 가만히 섰어. 안 들리니? 어서 가져와. 계집에게서 온 건 다 가져오
너라.”
영식이는 이리도 저리도 하는 수 없으니, 에이 하고 아주 말을 내려 하였
다. 그 때 안방 미닫이 문을 반쯤 닫고 앉으신 조모님이,
“가져오너라. 어른의 화만 돕지 말고. 못 가져 올게 무어 있니, 이 다음
부터만 안 그랬으면 그만이지.”
하신다. 말씀이 끝나자,
“그래도 섰을 터이냐?”
날카롭게 부친의 음성이 울렸다.
“아니야요..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닙니다.”
“무얼 어째?”
하는, 날카로운 음성에 영식이는 또 쭈뼜하였다.
“한다할수록…… 이놈! 부모 앞에서 그 계집 자랑을 할 테냐? 나쁜 년이
아냐? 나쁜 년이 아니면 왜 남의 집 사내 보고 편지질을 하니. 무어 사랑이
야, 사모한다는 건 무어냐. 이놈 부모가 꾸짖으면 다소곳하고 듣는 게 아니
라 나쁜 여자는 아니야?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니. 그렇게 그 계집이 못 잊
히면 나가거라. 나가서 그 계집하고 살든지 말든지 나는 그런 꼴 안 본다.
그게 자식이냐 무어냐? 나가 ──. 섰지 말고 어서 나가거라. 편지 다 짊어
지고 나가.”
점점 큰일 났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랑에 김과 임이 있을 생각을 하니
까, 속이 더욱 좁아든다. 부친의 음성이 크면 클수록 자기 가슴을 칼로 베
는 것 같았다. 더구나 김이 들으면 금방 조가 알고, 조가 알면 반드시 허의
귀에도 들어갈 터인데……, 하고 걱정을 하고 섰다.
“나가, 어서 보기 싫다.”
음성은 점점 커졌다. 이제는 돼가는 대로 될 밖에 없다고 결단하고 섰을
때에, 도리어 나가라는 소리는 무섭지 않으나 다만 밖에 섰는 김과 임이 들
을걸 하고 그래서 이 말이 허에게까지 갈 일이 걱정된다. 말 좋아하는 김이
밖에서 이 말을 죄다 듣고 가서 여럿이 모인 데서 가장 잘 아는 듯이 부친
의 음성을 그대로 흉내를 내면서 떠들 일, 조에게 전하여 허가 듣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등을 생각하고 섰다. 젊은 남녀가 손에 손목을 잡고, 도망가
는 양도 눈에 보이는 듯 생각된다. 이대로 안 나가면 등을 밀어 내 보내시
지 않으려나 생각도 난다. 지금쯤 조모님이 말려 주시련마는……. 하여도진
다. 이 요란한 중에도 잠시 꿈 속 같이 공상이 드는데 또,
“어서 나가.”
하고 뇌성같이 울려서 깜박 깨었다.
“이애야, 사랑으로 가거라. 행여 이담에는 그런 년하고 상종하지 말
고…….”
조모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성인의 말씀같이 들렸다.
조모님은 다시 부친을 보시고,
“이제 그만두어라. 저도 그만하면 정신을 차리겠지…….”
하심에 부친은 잠자코 계신다.. 그래도 곧 나갈 수가 없어 가만히 섰었더니
조모님께서,
“어서 나가, 그리고 서서 화만 돕지 말고 어서.”
하시므로, 슬금슬금 내려가 사랑으로 나갔다.
사랑에는 어느 틈에 갔는지 김과 임은 있지 아니하였다.
그 후 며칠이 되지 못하여 그의 동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허에게서 편
지 자주 오던 일, 그로 인하여 부친의 노염을 사서 내어 쫓길 뻔한 일을 낱
낱이 알고 있었다.
“에끼 이 사람, 그렇게 편지 왕래까지 하면서 겉으론 혼자 점잖은 체한단
말인가?”
보는 대로 이런 말을 하지마는, 그런 소리 듣는 것쯤은 영식에게 아무렇지
도 않았다. 아주 평범하게,
“아는 사람에게 편지하기로 점잖지 않을 게 무언가.”
할 뿐이었다. 그런 후부터는 어쩐 일인지 그네의 비웃는 듯한 농담이 좀 적
어졌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영식이 마음에 아무 관계 없었다. 요사이 영식
의 머리와 마음은 학교 주소로 온 허의 편지에,
“영식 씨를 위하여 제가 희생자가 되어, 영구히 홀로 울밖에 없을까 봅니
다.”
한 구절로 가득 찼었다. 김이 조에게, 조가 허에게 말을 옮겨 간 것이 눈
에 보이는 듯하였다. 조가 전하는 말을 듣고 이미 처녀도 아닌 그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가슴이 쓰렸을까. 잡년이니 나쁜 년이니 한 소리를 그대로
옳겼으리라. 설마 면대해서야 그렇게 전했으랴. 아니아니 여자끼리 만나서,
“에그 막 뉘 딸이냐, 어떤 잡년이냐고 별별 욕을 다하더랍니다.”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듣고, 오죽이
나 분하였을까. 오죽이나 속이 상하였을까……. 그 소리를 듣고 사흘 낮 사
흘 밤이나 잠을 안 자고 울었다 한다. 자기의 일신이 영식 씨에게서 멀리
떨어져 가지 아니하면 영식 씨의 학문도 일신도 전 생활이 파괴되고, 세상
에 소문만 나쁘게 퍼질 대로 퍼지겠고……. 아무리 잠을 안 자고 생각하여
도 자기가 울면서라도 영식 씨를 위하여 멀리 떨어져 가기 않으면 안 되겠
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일생의 전 희생이라고 한다. 영구히 영구히
홀로 있어 이 때까지 주신 영식 씨의 사진과 편지를 읽으면서 늙겠다 한다.
이 쓸쓸한 세상에서 끝끝내 외로이 영식 씨를 그리워하다가 죽겠다 한다.
그 중의 서너 곳 글자 획이 잉크가 부옇게 풀어진 것을 보면 분명히 그가
쓰면서 울던 눈물 자국이었다……. 아아 정숙 씨!…… 그는 허공을 쳐다보
고 불렀다. 편지 쥔 손이 주먹으로 쥐어져서 바르르 떨릴 때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벌써 가을인가 싶은 따뜻한 오후, 해가 서천에 기울고 서대문 감옥의 굴뚝
에서 검은 연기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중〈3〉
9월도 벌써 그믐이 가까워서 아침저녁으로는 저으기 산들산들한 맛을 알게
되었다.
하늘도 시원스럽게 개여, 구름 한 점 없이 따뜻한 토요일 오후 3시쯤이다.
금화산(金華山) 뒤 능으로 가는 좁다란 길 옆 잔디밭에 아까부터 온 영식이
가 앉아서 허가 오기를 기다리는즉 시간을 어기지 않고 산밑 과수원 사잇길
로 걸어 그가 왔다. 다른 때같이 얼굴이 붉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퍽 기다리셨지요.”
“아니요. 온 지 얼마 안 됩니다.”
서양 사람처럼 처음 반가워하는 품은 악수나 할 것 같았으나 이렇게 간단
한 문답으로 인사는 대신되었다. 그리고는 예정이나 했던 것처럼 영식이가
앞을 서서 능으로 가는 송림 사이의 꼬불꼬불한 작은 길로 걸으면서,
“오시다가 누구 만나지 않으셨어요”
하니까.
“네 ──. 냉동 신작로에 오다가 전도사를 만나 보고는 아무도 안 만났어
요…….”
하면서, 뒤를 따라 걸었다. 크지도 깊지도 않은 솔밭을 이리저리 길따라 꼬
불꼬불 걸으며, 두 사람은 솔밭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일본인이 식목을
하면서 무슨 나무인지 한 자 길이쯤 되는 묘목이 보기좋게 나란히 심겨 있
었다. 여기서 편편한 길대로 가면 애우개 너머 굴레방다리로 가는 줄을 영
식이는 뻔히 알았다. 그리고, 그 중간에 부인네 많이 모이는 빨래터가 있는
줄도 알았다. 이 날도 방망이질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멀리 울려 들렸다. 영
식이는 그 길을 피하여 묘목 사잇길로 걸어 수직하는 일본 집 앞을 지나 그
끝 솔밭으로 들어갔다. 허는 그대로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송림
속 일광이 새어 들어오는 곳, 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벌써 그 너머는
애우개로 통한 양화도(楊花渡)로 가는 길이고, 저 언덕 끝으로 서강(西江)
와우산(臥牛山) 머리가 보였다. 손수건을 펴고, 그 위에 앉아서 허는,
“참 많이 왔어요.”
하였다.
“네 꽤 멀리 왔습니다. 요 너머가 양화도 가는 길이고, 저기 보이는 게
와우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 저기로 넘어가면 연희 전문 학교가
있습니다.”
잠시 잠잠하다가 허가 자기 구두코를 내려다보면서,
“그런데 요새는 말씀을 덜 하셔요?”
하였다.
“집에서요? 요새는 학교에만 갔다 와서는 별로 나오지 아니하니까요. 감
시를 퍽 몹시 하시지만 편지도 오는 것 없고, 밤에도 아니 나오고 하니까
아무 말씀 없습니다. 퍽 염려되셨지요?”
“댁에서 그러셔서 어떻하면 좋아요.”
또 잠깐 잠잠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계속되어 피차에 서로 매일 밤 속을
태우는 이야기가 한참 동안이나 길게 설파되었다. 그러나, 어제까지 편지를
써 보낸 그 말을 되풀이한 것밖에 아무 새 말이 없었다.
“댁에서는 편지 자주 오는 것을 의심 아니하십니까”
하고, 잊었던 것을 새로 기억한 듯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네, 집에서는 그리 의심 아니하셔요. 전에 학교에 다디던 동무에게서도
늘 오고, 서양 부인에게서도 자주 오고 하니까요…….”
“그렇기만 하면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요새는 집에서도…….”
“네? 댁에서도…… 무엇이야요”
“오늘 뵈오면 말씀하려고 편지로도 아니 여쭈었어요.”
“네 ── 괜찮습니다. 무어야요, 아셨습니까?”
“아 ── 니요.”
하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퍽 머뭇머뭇하다가 고개가 조금 더 숙어지면서,
“저어 혼처가 났다고 하셔요.”
무엇에 눌린 것처럼 한참이나 둘이 다 잠잠하였다. 잠잠히 허의 수그린 트
레머리를 보던 영식이는 돌연히 여러 가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
오 시집을 자꾸 가라고 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가야겠다는 말을 하려는구나
생각하였다. 오오 인제 생각하니까, 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멀리 떨
어지겠다는 소리도 오늘 이 소리를 하려고 전제로 한 말이로구나 생각하였
다 고개를 수그리고 아주 . 약한 자인 것처럼 풀없이 앉았는 꼴이 밉게 보였
다. 전후 머리를 한데 모아다 머리 뒤로 비비튼 꼴도 미웠다. 그 트레뭉치
에 빗 꽂은 것도 몹시 미웠다. 그 밤 이후 일종의 죄악의 공포를 느끼는 그
가 어느 때는 고민하다가, 에그 그가 다른 곳으로 시집이나 슬쩍 갔으면 아
무 일 없이 시원하겠다는 생각도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앞에
서 혼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없이 밉다. 그 때 고민 고민하던 끝에 그
런 생각이 날 때에 그래도 자기는 즉시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죄악이
다 하고, 그 마음을 없이하였었다. 아아 그런데 지금 허는 혼처가 있으니
까, 그 곳으로 가겠다고 생각을 한단 말이다.
아아 여자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한데 모아 비비틀어 놓은, 그 머리같이
갈래가 많구나, 알 수가 없구나, 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는 것이
더욱 밉다. 그러나, 어쨌던 소리나 시원히 들으려고 전력을 다하여 은근히,
“그래 그리 시집을 가시렵니까?”
“네.”
하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앉아서 대답하고 다시 말을 이어,
“미국 갔다 왔는데 서른한 살이나 되었대요. 자기는 아내를 천천히 얻으
려도 그 노모가 하나 있는데 병객이어서 오래 못 살겠으니까 올해 안으로
며느리를 보게 하라고 해서 혼인을 속히 해야 할 터인데 하필 저를 늘 보았
다고 저하고 결혼을 하자고 한 대요…….”
“그래 어떻게 하시렵니까?”
묻고는 그를 노린다. 간다면 손찌검이라도 할 것같이 그의 눈은 노기에 찼
다. 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가긴 어디로 가요. 아버지께서는 그가 상당한 인격자이고, 또 그처럼 내
게 말을 하는데 싫다는 수도 없거니와 너도 여태 돌아만 다녔지 살림살이를
보고 배운 게 없는데, 그런 이가 구혼하니 그런 다행한 일이 어디 있느
냐.”
고 하시고, 어머니께서는,
“그가 인물도 잘 나고 미국에서 돈도 좀 모아 가지고 왔으니, 살림이 구
차하지도 않을 터이고, 또 그가 외국까지 다녀왔으니까, 아내를 위해 줄 줄
도 알 테고, 그런 좋은 데가 어디 있느냐고 가라고 자꾸 하시지만…….”
“그런데 어떻게 안 가십니까?”
그의 눈의 노기는 그대로 풀어지지 않았다.
“그러시거나 말거나 나만 안 가면 그만이지요. 끌어 가겠어요?”
“왜 안 간대요. 무슨 핑계로요?”
“핑계야 핑계댈 게 어디 있어요?”
“그럼 어떻게 안 간다나요?”
“싫으니까 안 간다지요.”
“왜 무엇이 싫테요?”
“그냥 싫으니까 안 가겠다고 안 가면 그만이지요.”
어느 틈엔지 영식의 눈에 분기는 사라지고 그 눈도 풀없이 아래를 향하였
다.
영식이는 겨우 마음이 놓였다. 심중으로 ‘고맙습니다’ 하였다. 그 손목
을 꼭 쥐고 ‘아! 나의 정숙(貞淑) 씨 감사합니다!’하고 싶었다. 역시 신
성하여 보였다. 자기의 마음을 그에 비하여 보고, 몹시 자신이 동요가 심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저도 집에서 무어라 하시거나 영(永) 그리로는 가지 않으렵니다.”
“그러노라니 댁내에 풍파만 일어나고 오죽합니까?”
하면서 고개를 겨우 조금 든다. 그 동안에 시간이 퍽 지난 것 같아서 해가
꽤 기운 것을 알았다. 머리 위에 솔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잠시 조용
한 틈에 빨래 소리는 멀리 여기까지 들렸다. 어디서인지, 누구인지 휘파람
부는 소리가 나므로 주의하니까 표박가(漂迫歌)였다. 본즉, 저 아래 묘포
옆으로 양복 입은 학생 하나가 책보를 끼고 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연희
전문 학교 학생이 돌아가는 것인가보다 생각하고 안심하였다. 표박가의 휘
파람 소리는 그 학생이 안 보이게 된 뒤에도 들려왔다. 영식이는 다시 자기
일을 생각하였다. 공부나 한 뒤 같으면 아무 데를 가더라도……, 생각하였
다. 새삼스럽게 표박가를 또 생각하였다. 눈 오는 벌판으로 애인의 손목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표박하는 철인 ‘후에어쟈’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기와 허가 끝없는 벌판으로 표박가를 부르며 흘러 돌아다니는
모양이 눈에 보였다. 아아, 졸업만 한 후였다면……, 생각할 때에 잠잠히
있던 허가 한숨을 쉬더니 맞잡고 있던 손으로 옆의 풀 한 줌을 뜯으면서,
“에에 ──, 아주 사람 없는 아무도 없는, 먼데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
요.”
하였다. 영식이는 의미 있게 들었는지,
“아무 데구 가는 거야 무엇이 어려워요? 가기야 쉽지만 가서는 어떻게 합
니까”
하였다. 허는 한참이나 잠잠히 있다가 웃는 소리같이,
“세상에 돈 없이 사는 나라 없나요?”
하였다. 영식이도 픽 웃었다. 몹시 그윽히 쓸쓸한 웃음이었다.
벌써 얼마 아니 있어 해는 질 것 같았다. 어디서 생겼는지 없던 구름이 조
그마하게 저쪽 얕은 곳을 흐른다.
하〈1〉
11월 18일.
자기는 안 가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했으나 들은 체 만 체하시고, 부친께서
그와 상의하여(상의보다도 그가 하자는 대로) 혼인은 그 날로 정하셨다고,
허의 편지를 받은 영식은 벌써 가슴이 무엇에 쫓기는 것 같았다.
암만하면 그 날 혼인이 될 줄 아나? 하고 언뜻 이런 소리도 하였으나, 그
래도 책상 위에 걸린 일력을 떼어 들고 11월 18일 날짜를 찾아보아졌다. 목
요일이었다. 벌써 오늘이 11월 5일! 이제 2주일도 남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것은 벌써부터 속을 태워 오던 생각이지마는 이제
는 이제는 우리 집에서만 허락한 대도 소용이 없이 되었다. 지금 와서는 오
직 도망! 그것밖에 취할 길이 없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도망갈 꾀
가 있나……,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가
슴만 뻐개질 것같이 무겁고 답답할 뿐이고, 졸업만 한 뒤였다면……, 하는
소리만 한숨과 함께 덧없이 반복되었다.
다음 다음 날 일요일에는 다른 때보다도 빨리 예배당에서 허를 기다렸으
나, 웬일인지 그는 영 오지 않았다. 웬일일까…… 하는 생각이 영식이 가
슴을 더 번민케 하였다. 속을 썩이어서 집에 파묻혀 있는가, 혼인 때까지
그 부모가 내보내지를 아니하나? 그는 집에서는 지금 혼인 준비에 분망하렸
다. 아아, 그 속에 파묻혀 있어서 허가 오죽이나 가슴이 타랴. 별별 궁리를
다 하여서, 내 편지만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허의 사
진을 책상 위에 들고 앉은 그의 머리에는 거번(去番)에 금화산 뒤 능림 속
에서 둘이 이야기하던, 그 모양이 떠돈다. 속상하는 듯이 옆의 풀 한 줌을
북 뜯어서,
“아주 먼 ── 사람 없는 데가 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던 그 태도가 눈에 보이고, 그 말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너그럽지
못한 여자의 속을 그렇게 태우는 그가 지금 얼마나 나의 무능을 탄식하고
있을까……. 그까짓 주변 하나를 이겨 내지 못하는 남자! 자기가 스스로 생
각한 이 소리가 영식의 마음을 더 괴롭게 조였다.
주변없는 사나이! 이 소리로 더 마음을 울리고, 끓이고, 태우고 하는 영식
이는 두 번째나 부친의 문갑을 열고 한성 은행(漢城銀行)의 통장과 소절수
책(小切手冊)을 주물렀으나, 부친의 허리띠에 달린 염낭[囊] 속에 들어 있
는 인장을 어쩌지 못하여 만질 때마다 낙심하였다. 그것도 틀렸다! 하고 절
망의 소리를 발할 때 그의 머리는 벌써 단말마(斷末魔)에 미쳤다.
벌써 겨우 1주일 남았다. 파멸의 날이 절박해 왔다. 고민 고민하다가 영식
이는 에에 얼른 시집이나 가 버렸으면, 이런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러
나 그 날 밤의 일을 언뜻 생각할 때에 그는 몸이 쭈뼛하였다.
죄악이다! 그의 머리는 이 전기에 찔려 떨렸다. 아아 어떻게 할까……. 주
변없는 남자! 이 소리는 또 그를 몰아세웠다.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이 주일
안에 처단을 하여야 한다. 어떠한 희생을 바치든지…….
단말마에 미친 그는 기어코 윗집 백부의 철궤를 생각하였다. 집어만 가지
고 달아나서 자세한 상서를 드리면 그만이지, 설마 나를 고발을 하려고
……. 그 집에 가면 사랑 전당포에도 돈궤가 있고, 안방에도 철궤가 있다.
기회를 엿보아 틈만 있으면……, 하고 이렇게 생각을 정하니까, 마음이 조
금 덜 무거운 것 같다.
전부터 자주 가지는 않았지마는 허와의 일을 그 집 사촌 형이 조모님께 여
쭈었다는 뒤부터는 같은 모화관(慕華館) 한 동리건마는 일체 가지 아니하던
터이라, 이제 새삼스럽게 가는 것도 우습고 이상하지마는 그래도 어쩌는 수
없어 다만 사촌 형만을 피하기 위하여 매일 저녁 때 가까워서 그가 일수 받
으러 나가고 없을 때에 갔다. 백부는,
“공부하느라고 그 새 한 번도 아니 왔니?”
하시고 백모는,
“아이구, 너 오래간만에 보겠구나,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못 됐니”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에 저절로 주춤하기도 하였으나 가족답게 친척다운
친하고 사랑스런 맛을 그윽히 느꼈다. 누구보다도 모든 일에 동정까지 해
주실 것 같다. 그러나 잠자코만 있었다.
“이 닭을 언제 사 오셨어요? 그놈 큰데요. 얼마씩이나 주셨어요? 새벽엔
잘 울어요? 여기는 고양이가 오지 않아요? 아랫집에는 고양이가 어떻게 많
은지……, 그 대신 쥐는 적어요.”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애써 늘어놓으며 기회를 엿보기를 2∼3일째 하였
다. 그러나, 전당포에는 서사가 잠시도 떠나지를 않고, 안에는 백부가 출입
을 일체 아니하시고 하여 틈이 없었다. 그러나 2∼3일 더 틈을 보면 기회가
있겠지 하고 그리 낙심하지 않았다.
놀러 갈 겨를이 없어서 별로 가지도 않았지만 한 번 큰집에 가는 길에 동
무를 만나서 그와 함께 늘 모여 노는 사랑에 가니까, 장난 좋아하는 김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곡조도 잘 모르는 장한몽가(長恨夢歌)를 말까지 고쳐 가
지고,
인왕산 밑 성길을 산보하는
최영식과 허정숙의 양인이로다.
둘이 함께 산보함도 오늘뿐이요…….
하는 것을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김을 보고, 눈을 흘기며 혀를 차는 얼
굴에는 그윽히 자기에게 동정하는 빛이 보였다. 그 기색을 본 뒤로는 자기
몸이 갑자기 더 애처롭고 심산하게 생각되었다. 매일 기회를 보지만, 기회
는 이때껏 얻지 못하고 허의 혼인은 내일 모레로 닥쳐왔다. 너무 근심을 하
고 속을 태운 탓인지, 머리가 띵하고 소변이 순하지를 않아 무슨 병증 같기
도 하여 염려되었다. 벌써 모레인데 이제는 모두 허사다……. 낙담 실망!
기진 역진하여 이제는 다시 어찌할 힘도 없이 늘어진 영식이가 해질녘에 집
에를 들어가니까, 사랑 많으신 조모님과 모친께서 근심하시며,
“이 애야, 네가 요새 왜 밥도 잘 안 먹고 얼굴이 저렇게 못 되어 가
니…….”
하시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벌꺽 터질 것 같고, 어느덧 눈물이 가득히 고
여서 대답도 아니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부모가 너무 완엄하셔서 일생의
대사를 어린 몸이 저 혼자 이때껏 애를 쓰고 다닌 일을 생각지 못했고, 부
모가 너무나 야속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벌써 눈물이 흘러서 옷자
락에 떨어지므로 그대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 밤에 자리에 누워서 내가 이대로 죽으면……, 생각이 나서 한없이 부모
의 일이 야속하여 자꾸 울었다.
하〈2〉
영식이는 번민하는 대로, 허는 자기 집에 있는 채로 기어코 혼인날은 왔
다.
어떻게 되려노……, 허가 그냥 갈 터인가……. 허가 신부복을 입고 그 자
동차를 그냥 탈 터인가, 그리고 예배당에를 가서 그 층계를 밟고 목사의 앞
에 나가서……, 아아 하나님과 주님 앞에 맹세를 드릴 터인가. 처녀도 아닌
몸이, 아아 죄악이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그는 학교에도 아니 가고 중얼
거렸다 그가 갈 터인가 . , 처녀 아닌 그가 잠자코 갈 터인가, 신부복을 입을
터인가, 뜻없는 남자와 백년을 살겠다고 주(主) 앞에 맹세를 드릴 터인가.
그 때 목사가 일반을 향하여, ‘여러분, 오늘 이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데
대하여 이의를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하고, 물을 때 오오 그 때 아아
그 때 내가 가서, ‘있소.’하면, 어찌될 터인가.
“그 신부는 이 몸 나와 모든 형식보다도 실제로 결혼한 지가 오래였소.”
하면, 어찌될 터인가? 그럼 허가 어쩔라노 ──.
아아 그래도 안 입으리라. 강제에 어쩔 수 없으면? 그러면 자살? 아아 허
가 자살을 하여 ──, 아아 어찌되려노, 그가 자살을 하고 내가 따라 죽고,
그러면 고집을 세우던 부모들이 후회를 하겠지. 저 좋아하는 사람하고 혼인
을 해줄걸, 공연히 우겼지 하고 울겠지……. 그는 벌떡 일어나 옷은 두루마
기 그대로 모자만 집어 얹고 집을 나섰다. 어디를 갈 곳도 없이 그는 어슬
렁어슬렁 감영(監營) 앞에 이르렀다. 덮어놓고 문 안 들어가는 전차에 올라
탔다.
전차가 새문턱을 지날 때에, 오늘은 이 곳 예배당에서 예식을 한다니까 이
길로 자동차가 다니리라 생각하면서 정동길을 보았다. 그 길에는 서양 부인
두 사람이 걸어오는 이뿐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차가 흥화문(興化門) 긴 담
을 지날 때 비로소 영식이는 어디를 갈까 생각하였다. 연극장에나 갈까 하
였으나, 목요일이니까 낮 흥행이 없었다. 차가 광화문 앞을 지날 때, 본정
희락관(本町喜樂館)에 매일 낮 흥행이 있는 것을 깨닫고 바로 황금정에 가
서 내려 본정을 꿰뚫고 희락관으로 들어갔다. 연속사진(連續寫眞), 일본 구
극(日本舊劇) 등을 좋은지 언짢은지 알지도 못하고 멀거니 앉아 그래도 끝
까지 보았다. 오후 4시까지 잠시 번민을 잊고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가
슴 쓰린 번민을 또 할 생각을 하니까 몹시 덧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도
리어 오늘 혼인 일이 몹시 궁금하여서 바로 집으로 나왔다. 그러니, 어디
누구에게 오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알게 되겠지 ── 하고,
집에 들어가니까 의외에 허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심히 이상하여 급히
뜯어 본즉 연필로, 암만해도 인간의 일을 조종하는 운명의 실줄이 매어 있
는가 봅니다. 필경에 주님도, 부모도, 세상도 모두 속이고 허위와 죄악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뜻아닌 생활에 끌려가는 이 몸이 무슨 행복과 무
슨 안락을 바라겠습니까, 며칠이나 살는지 세상을 떠날 그 날까지, 귀하를
그리워하다 죽겠사오며, 영원히 남이 될 귀하에게 일생에 마지막 드리는 붓
이오나 쓸 틈도 없었고, 눈물이 종이를 적시어 길게 쓰지 못하옵고, 오직
지옥의 생활로 들어가는 몸이 오직 한 구절 ‘괴테’의 시를 드리고 갑니
다.
그나마 넉넉히 피할 수 있는 길을 부모의 억제로 희생이 되오니 더욱 애통
합니다.
희생의 고기[肉]는 여기 있도다,
그것은 양도 아니고
아아! 그것이 인육의 희생일 줄이야!
마지막 당신의 CS 상
거듭 그 밤에 배달된 신문에 신랑 신부라 하고 신랑과 허의 사진이 나란히
났었다.
하〈3〉
그 뒤부터는 영식이는 거의 실신한 사람이었다. 늘 눈에 보이는 것이 월암
(月岩) 바위 위의 그 날 밤 일이었다. 아아 그는 처녀는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시집을 가서……, 남편을 섬기고……. 영식이는 그 뒤, 자
리에 누워서 고민할 때에 언뜻 이런 일을 생각하였다. 말로는 희생이니 무
어니 하여도 기실은 싫단 말 없이 간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 나온 이!
저네들 일부 여자가 자유의 나라라고 아메리카 천지를 동경하는 것도 사실
이고, 이상의 남편을 미국 유학생에 구하려는 것도 숨기지 못할 사실이었
다. 아아 허도 그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아 싫단 말 없이 갔다! 아니 아
니 지금 여자가 모두 그래도 허에 한해서는 아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내가 믿는다. 희생이었다! 희생이었다! 매일 매야 이것으로 헤매었
으나, 이 날까지 어느 편이 그 옳은 관찰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얼빠진 꼴로 길을 걷는다. 부드럽고, 희고, 곱던 얼굴은 얄미운 편에
가깝게 누렇고 말랐다. 무슨 중병을 치르고 난 사람 같았다. 그는 길을 걷
는다. 무엇 잃어버린 사람같이…… 그리고 길로 가다가 차에서나 길에서나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볼 때마다 잠시 잊었던 그 날 밤의 일이 생각
난다. 아아 저 여자도 다 여자인 이상 반드시 비밀이 있다. 저렇게 허처럼
태연히 지나간다. 그러나, 그에게 비밀의 죄악이 없다고 무얼로 변명을 하
느냐, 무얼로 증명을 하느냐. 아이 저기 또 여자 하나가 온다. 이 세상이
넓다 하기로 그 누가 저 여자의 신성을 증명할 자냐. 아아 비밀이다. 세상
은 비밀이다.
그의 이 관념은 나날이 도를 가하여 간다. 그 날 밤의 일이 눈에서 사라지
지를 않았다.
그 다음 일요일의 오정 때, 문 안 가는 차에 그는 탔다. 그 차가 새문턱을
지날 때, 정동 예배당에서 나온 이인지 트레머리한 여자와 중산모(中山帽)
쓴 이가 많이 기다리다가 모두 올라 탔다. 그 중에 가장 새 양복 입은 신사
하나와 그 앞에 새 옷 입은 여자 하나, 그가 허고 허의 남편이었다. 영식이
는 쭈뼛하였다. 머리가 화끈화끈하고 가슴이 울렁울렁하였다. 뒤미쳐 그 뒤
신사가 차표 두 장을 내어미는 것을 보고, 그는 참다 못하여 고개를 돌렸
다. 이윽고 자리를 잡아 앉은 허가 영식이를 보았다. 영식이 역시 가슴을
울렁거리면서도 고개는 또 그 부인을 향하였다. 할 수 없는 듯이, 그러나
태연히 허가 반쯤 일어나 고개를 굽혀 인사하였다. 이것 저것 생각할 사이
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모자 끝에 손을 대고 고개를 잠시 굽혔다. 그리고는
저편에서 어쩌거나 더 볼 용기도 없이 고개를 돌리고 아주 무심하게 일없이
앉았다가, 차가 흥화문 앞에 쉬일 적에 그는 급히 뛰어내렸다. 차가 저만큼
지난 후에 그는 달아나는 차를 바라보며, 아아 그는 역시 부인이었다! 하였
다. 그는 다시 걸었다. 걸어서 도로 새문 밖을 향하였다. 그는 또 중얼거렸
다.
그가 흔히 전에 처녀가 아니었었던 줄을 누가 아느냐, 남편도 모른다. 그
의 부모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여자의 비밀을 누구라서 알 것이냐, 그
밤에 떴던 그 별이 말을 아니하는 이상, 그 천공이 말을 아니하는 이상, 땅
이 말을 아니하는 이상, 누구라 그 비밀을 알 자이냐. 정부의 비밀은 샐 때
가 있다. 궁내성(宮內省)의 비밀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의 비밀을
누구라 알 수가 있느냐. 아아 저기 여자가 온다. 점잖은 여자다. 쪽을 지었
으니 남편 있는 여자다. 그러나 그 이상의 비밀을 누가 아느냐.
중얼거리면서 그는 금화산 길을 향하였다. 산에는 별이 따뜻하지만 그래도
산상이라 바람이 차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눈 앞에 내려다보이는 경성
시가를 보고, 아! 비밀의 세상에 무엇을 안다고 와글와글하는가……. 바둑
돌같이 늘어놓인 지붕, 저것이 모두 죄악이 숨은 집이다. 모두 비밀의 소굴
이다! 아아 세상의 여자, 그의 신성을 누구라 말하느냐, 그의 무죄를 누구
라 증명하느냐. 집에서는 나의 혼처를 정해 놓았다. 내년 봄에 혼인을 하라
한다. 그렇지만 그 여자의 일을 누가 아느냐? 입고, 먹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그 부모가 알겠지, 그러나 어떻게 그 이상의 일을 부모는 아느냐. 그
가 어느 때 어느 날 어떤 곳에서 어떤 청년, 어떤 연인하고 어떻고……, 아
아 여자의 비밀을 누구라 아느냐? 하늘과 땅, 별과 등불, 그것이 허도 그런
것을……, 허도 비밀은 있는 것을……, 아아 허는 처녀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시집에서 잘 산다 . 그의 비밀을 세상은 모른다. 세상은 속는다. 여자
있는 곳에 반드시 죄는 따른다. 천국 천국하여도 만일 여자가 있으면 반드
시 거기도 죄악은 있다. 아아 여자 없는 곳, 그 곳이 천국일 것이다.
그 후 4시 쯤 뒤, 해 저물 때, 실심한 영식의 몸은 인천의 인적 드문 바닷
가 모래 위로 털썩 엎드려서 희고 고운 모래 위에 허정숙 석자를 쓰고는 지
우고, 지우고는 쓰고 있었다.
그는 아까 인천 정거장 매점에서 봉함 엽서 한 장을 사서, 가장 친한 친우인 임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임 군! 오랫동안 폐도 많이 끼쳤고, 실례도 많이 하였소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인천 해변에서 먼 길을 떠나려 하오. 어디든지 자꾸 가려고, 천국이 보일 때까지, 여자 없는 죄 없는 세상이 보이기까지 자꾸 가려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그냥 떠나가오. 내내 평안히 계시기 바라고 마지막 이 붓을 놉니다.’
마지막 날 세상을 가려는 최영식(崔英植)
그는 이윽고 벌떡 일어섰다. 바다 저 어귀에 어디로 가는 배인지 돛단배가 표연(飄然)히 떠 있다. 아아 저 배를 타고 먼 ─ 먼 ─ 곳으로 갔으면 끝없이 자꾸자꾸 가 보았으면…… 하였다. 그러나, 즉시 아니 아니 아무리 간대도 이 지구에는 여자 없는 나라는 없다. 아아 이 세상에는 죄악 없는 나라는 없다.
그는 부르짖는 소리가 처량하게 흘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가를 바라보았다. 해가 막 저물어 세상이 조금씩 어두워 간다. 어느 틈에 그의 눈이 젖어 있었다.
해는 아주 저물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바다를 향하고 걷는다. 바위라도 삼킬 듯한 큰 물결이 자꾸 그의 앞으로 밀려온다.
〈牧星[목성]〉
어문출처: 그날밤, 소파 방정환(1899~1931), 공유마당, 만료저작물
이미지출처: 떠 받으려는 소,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 공유마당, 만료저작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