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다양한 얼굴들
(2014년 6월)
[호]
맨하튼 한달살기를 하며 매일같이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궁리하는 시간이 즐겁다.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심지어 즉흥적으로 하루를 사는 요즘이다.
오늘은 갑자기, (그러나 드디어!) 할렘을 가볼 마음이 동해서 버스를 타고 할렘으로 향했다.
맨하튼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센트럴 파크 북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할렘(Harlem).
할렘 지역은 주민의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뉴욕의 대표적인 빈민가로, 치안 상태가 좋지 않아 흔히 무법지대처럼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20여년 전에 부임한 줄리아니 시장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마피아와의 전쟁'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쟁' 등
'더블 윙(Double Wing)' 전략을 추진한 이후 많이 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할렘가를 가보기 위한 마음의 준비시간은 필요했다.
센추럴 파크 96번가에서 버스를 타고 10여분 가니
아이비 리그 대학중의 하나이자 오바마 미 대통령이 졸업한 콜럼비아 대학이 나오고,
조금 더 가니 125번가 '마틴 루터 킹 스트리트'가 보인다.
이곳이 할렘의 중심가이자 메인스트리트인 셈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곧장 아폴로 극장이 보인다.
1800년대 중반,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에드워드 페레로 장군이 1913년에 설립한 아폴로 극장은
당시 9살이던 마이클 잭슨이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무대에 올라 데뷔한 곳이자,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을 때 추모식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2025년 현재도 마찬가지),
이곳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나이트 아워(Amateur Night Hour)'를 통해
수많은 가수들이 데뷔한다고 한다.
아직 이른 오후 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아서 극장 입구만 구경하고 돌아나왔다.
길거리에는 많은 흑인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길거리 노점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등 북적였다.
뉴욕시가 십수년간 흑인문화를 전파하는 전초기지로 자리매김을 한 것에 더불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이후 흑인사회에서 할렘가에서의 폭력, 무법 행사를 자제한 덕분인지
이곳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대낮인데다 고층빌딩도 즐비한 메인스트리트 125번가를 배낭을 메고 걸어다녀도
조금도 걱정스럽지가 않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는 터라 30여분간 이리저리 구경하며 다니다
이번에는 지하철을 타고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LA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과 마찬가지로 맨하튼의 차이나타운도 클 뿐 아니라 활기가 넘친다.
나와 아내는 차이나타운에만 오면 사고싶은 것이 많아진다.
일단 풍부한 해산물과 잘 익어 향이 좋은 많은 과일들, 각종 견과류와 녹차, 자스민차,
보이차를 비롯한 다양한 차들, 뻬이징덕을 비롯한 입맛에 맞는 중국 음식들까지...
뉴욕의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가격들이 싸다보니 잠시 여행자임을 잊고 기웃기웃 해본다.
그런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한 골목을 더 돌아서자, 갑자기 유럽으로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도로변에 내놓은 식탁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려 있고, 포크와 나이프가 흰 수건에 싸여
한켠에 놓여 있는가 하면, 이곳저곳 식탁에선 이미 유럽인들처럼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이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때늦은 점심식사를 느긋이 하고 있다.
이렇게 길 하나를 건너면 곧바로 베니스의 어느 골목에 온 듯한 기분이라니?
과연 '인종전시장'이라는 뉴욕의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다.
지난 주말엔 그동안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주중과 달리 날씨가 화창하고 좋아서
맨하튼에서 지하철로 1시간이면 가닿는 코니 아일랜드(Coney Island)로 갔다.
코니 아일랜드는 뉴요커들의 주말을 책임지는 놀이공원이자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유명한 휴양지인데
부산 해운대 백사장과 인천 월미도 놀이시설을 합쳐놓은 것 같은 해변이었다.
코니 아일랜드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는 Nathan's Famous Hot Dog.
길거리 노점상이나 마트에서도 쉽게 살 수 있는 유명한 핫도그인데 오리지널 가게이다.
매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핫도그 많이 먹기 대회를 주최하는 걸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난해까지 3년간 여자부 연속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 한국인이라고.
마침 이 날 애완동물 콘테스트가 열려 각종 동물들이 미모와 재주를 뽐냈다.
맨하튼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만 달려오면 이렇게 해수욕을 할 수도 있고,
각종 놀이기구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
뉴욕시민들은 참 살기 좋은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는 셈이다.
매일같이 뉴욕의 다양한 얼굴을 하나씩 확인해 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2014/6월, 뉴욕 한달살기 중에 가족카페에 실시간으로 쓴 글입니다. 가족카페다보니 격의없이 씌어지거나 미처 생각이 걸러지지 못한 부분들도 있지만, 그 시절만의 옛스러운 정서와 감정에 의미를 두고 그대로 공유합니다. 가끔 글 중간에 2025년 현재 상황과 심정을 삽입하기도 하고, 글 맨아래에도 2025년의 현재 생각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호]
옛 노래 중에 "나성에 가면...."이란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편지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하늘이 푸른지 마음이 밝은지
즐거운 날도 외로운 날도 생각해 주세요
나와 둘이서 지낸 날들을 잊지 말아줘요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함께 못가서 정말 미안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안녕 안녕 내사랑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나성이 어딘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성(羅城)’은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약어 LA를 음차한 것인데,
군사정권 시절, 방송에서 영어를 쓰지 못하게 해서 작곡가 길옥윤이
나성으로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가수 바니걸스도 토끼소녀로 바꾸고. ㅎㅎ
현재에도 이민이란 것이 그렇지만, 이 노래가 발표된 시기인 1978년 이민이란 것은
말 그대로 영영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이었죠.
우리나라에 1인 1가구 전화 보급이 완료된 것이 1980년대 후반이니,
말 그대로 연락수단은 편지밖에 없던 시기, 그마저 중간에 한쪽이 이사를 가거나 하면 그대로 끝이었던
그런 시절에는 편지만이 유일한 연락수단이었으니.
그때 만약 "뉴욕에 가면..."이란 노래를 만들었더라면 어떻게 고쳤을까 상상해보지만 답이 없군요.
나도 언젠가 뉴욕에 다시 가게 되면 편지를 한번 써볼까 싶습니다.^^
[히]
2014년, 뉴욕 할렘가를 조심스레 (겉으로는 멀쩡, 속으로는 사람을 경계하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당시 '위험지역'이라는 인식이 많을 때여서 가이드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 나름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할렘가도 똑같은 사람 사는 세상이거늘.
10년이 지난 지금, '할렘' 에 대한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재건 사업으로 더욱 안전해진 지역'이라네요.
'지금은 뉴욕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집값이 오르는 지역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많이 성장해
할렘 르네상스의 명성을 다시 얻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사람 사는 세상, 그 어떤 안전한 지역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위험지역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뉴욕 할렘가를 다시한번 가볼 수 있다면 좀더 느긋하게, 여유롭게 할렘의 소울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소울음악의 중심지인 아폴로 극장에서 공연도 한번 관람해보고,
유명하다는 소울푸드 식당도 가서 할렘에서의 소울푸드 맛은 어떨지 느껴보고 싶습니다.
코니 아일랜드 핫도그 먹기대회가 지금까지 매년 이어지고 있는게 신기할 뿐입니다.
심지어 뉴스의 해외토픽 기사에까지 ‘핫도그 먹기 대회’의 우승자를 소개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회라니 사람들의 호기심과 승부욕의 끝은 어디까지인지..ㅎㅎ
10년 전, 코니 아일랜드에서 보았던 놀이공원이 떠오르네요.
시설로 치면 우리나라 첨단 놀이공원보다 훨씬 낙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 없이 신나하며 즐기고 있는 젊은 뉴요커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코니 아일랜드 놀이공원은 20세기 초,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놀이공원답게
뉴요커들에겐 어린 시절 찾아와 놀던 기억이 향수처럼 함께 하는 상징적인 장소랍니다.
현재 코니 아일랜드는 복고풍 놀이공원과 현대적인 관광지가 공존하는
명실공히 뉴욕의 대표적인 명소라고 합니다.
하루쯤 넉넉히 시간내어 간다면
뉴욕 한복판에서 해변의 낭만과 여유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