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싸움은 안하세요?"
<히>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구간에 속한다는
메세타 평원(부르고스에서 이어지는 180km 에 이르는 구간)을 걷는 중이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사이로 카페도, 물도, 나무그늘도
쉬이 나타나지 않는 길.
단조롭기 그지없는 길을 걷다보면 내면과도 깊게 맞닥뜨린다는,
어쩌면 성스럽기까지 한 이 메세타 길에서
우리는 자신을 성찰하기는커녕, 요즘 자주 싸움을 하고 있다.
순례 여정이 어느새 20여일이 가까워지며 몸과 마음의 긴장이 무너졌는지
순례시작, 일주일 즈음부터 몸의 피로가 누적되더니
요 며칠 전부터 마음의 피로까지 한꺼번에 누적된 듯.
서로 손발을 척척 맞춰도 쉽지 않을 순례길 위의 하루를 시작하며
마음속 꼬투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화를 낸다.
특히 내가! ('호'는 나를 답답하게 만들 뿐 본인의 답답함은 없는지, 먼저 화내지는 않는다)
안그래도 외로운 메세타 길에서
본의 아닌 묵언수행으로 몇km를 세상 외롭게 걷다가 때마침 만난 카페에서
한국인 순례자들 중 홀로 오신 중년 여성분들을 만났다.
우리 부부를 보며 가장 궁금한 질문이라며 묻는다.
"서로 싸움은 안하세요?
집에서도 엄청나게 싸우는데 어떻게 이렇게 같이 다니시는지가 제일 궁금해요! "
그 순간 정곡을 찔려 가슴이 뜨끔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잠시 잊었던 현실이 되살아나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아 원래 현실부부는 이런 거였지!
여행 나와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안)싸우긴 했구나!ㅎㅎ
차가운 생맥주를 부딪히며 스르르 화해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순례길에서 오래 싸우고 있을 수도 없긴 하다.
메세타 길의 텅 빈 공간 안에 하늘과 들판과 우리만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누구라도 먼저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소소한 싸움으로 감정을 소모하기에는
우리 앞을 지나쳐가버리는, 이 생에 다시 못볼 듯한
소중한 풍경과 순간들이 너무 아까워서이다.
좋은 풍경 앞에서 서로 다정한 척하며 사진도 찍어야 하므로.^^
당뇨 20년차 '호'의 혈당일지
부르고스를 떠나는 날, 올레코리아(한국음식테이크아웃점)에서 사온 김치통조림(반통)과 아끼던 밥을 메세타 길을 걸은 날 저녁 먹었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길과 풍경을 하루 온종일 보고나니 더 강렬히 우리 맛이 그리워서.
짭짤한 우리나라 김치에 비해 맛이 순한 통조림 김치라 그런지
생각보다 적게 나온 저녁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