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사람과 취향이 모이는 시간
[히]
이번 글에서는 보얼예술특구의 밤풍경과 함께,
주말에만 열리는 참신하고 개성 넘치는,
풋풋한 플리마켓 모습을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평일 낮의 보얼예술특구가 넓고 한산한 산책로에 가깝다면,
주말이 되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조명이 켜지고, 음악 소리가 섞이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이곳은 갑자기 ‘구경하는 공간’이 아니라 ‘머무는 공간’이 됩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다강교가 있습니다.
예술특구 중앙에 위치한 다강교는 그림같은 일몰과 야경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장 먼저 사람들로 가득 차는 장소입니다.
다강교는 길이 110m, 다리 폭 5~11m로, 총 550명의 사람과 자전거가
동시에 통행할 수 있는 타이완 최초 수평회전다리입니다.
밤이 되면 조명과 어우러져 유독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낮에는 구조물이 먼저 보였다면,
밤에는 풍경의 일부가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춰 선 사람들,
난간에 기대어 강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트램까지.
다강교 바로 앞을 지나가는 경전철(트램)은
예술특구의 밤을 더욱더 활력넘치는 낭만적인 거리로 만들어줍니다.
보얼예술특구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져 버려져 있던 항구 창고들을
2000년대에 들어 가오슝시가 예술가들과 함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입니다.
지금은 관광객뿐만 아니라 타이완 현지인들에게도 사랑받는
가오슝을 대표하는 공간이 되었는데,
낮에는 커다란 창고와 넓은 공터가 조금은 무심하게 느껴졌던 보얼예술특구가
밤이 되면 조명과 사람들 덕분에 전혀 다른 표정을 짓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허 강변과 어우러지는 가오슝 팝뮤직센터, 그리고 85빌딩가의 화려한 야경 역시
보얼예술특구의 밤을 완성하는 중요한 풍경입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독특한 조형물들이 특구 곳곳에 숨어 있어서
이곳에서는 목적 없이 걷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어둠속에서 저마다의 색채를 맘껏 뽐내는 보얼예술특구 거리 한쪽에서는
(주말에만 열리는) 개성 넘치는 플리마켓이 섰습니다.
생각보다 수많은 부스들에서 없는 거 빼고 다 있을 것 같은 각종 악세사리 소품들,
옷가지, 다양한 먹거리들을 팔고 있습니다.
낮의 보얼예술특구가 ‘공간’ 중심이라면,
주말 밤의 플리마켓은 분명 ‘사람’ 중심입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이곳 플리마켓은 대만의 전통 야시장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로컬 야시장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깔끔함과, 소란스럽기보다는 차분하고,
호객보다는 취향을 전시하는 느낌이랄까.
‘얼마나 싸게 파느냐’보다 ‘어떤 감각을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젊은 청년 주인들이 독창적인 신선한 감각으로 제각각 부스들을 꾸며놓아
꼭 쇼핑할 것 없는 우리같은 사람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크네요.
이틀 후면 할로윈데이여서 이곳 플리마켓도 할로윈 콘셉트로 꾸며진 소품들,
사진을 찍고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관광지라기보다는 동네에서 열리는 주말 장터에 더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한참을 걷고 구경하다 보니 시원한 생맥주가 한잔 생각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넓은 예술특구 안에서는 ‘술집다운 술집’이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떠들썩한 밤보다 산책과 구경에 더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생각.
결국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서 정식 생맥주 집을 찾아 한잔 합니다.
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이지만 왠지 관광객보다
이 동네 주민이 된 기분에 더 가까운 맛이랄까.^^
다음 주말에는 플리마켓에서 우연히 발견한 칵테일 바에서 모히또 한 잔,
또 그다음 주말에는 미리 마트에서 사 온 캔맥주를 들고
밤 산책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한 달을 산다는 건
특별한 장소보다
자주 지나치는 풍경을 하나 갖게 되는 일 같습니다.
보얼예술특구의 낮과 밤을 지나며,
이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살았던 풍경’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대만 가오슝 한달살기 중(2023년 가을), 가족 카페에 실시간으로 남겼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생각'을 때때로 덧붙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