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슝 한달살기(14)/도시의 숨터,
공원과 지하

활력가득한 중앙공원과, 화려한 미려도 역의 천장

by 호히부부

[호]



도시 한가운데 남겨진 여백


조용하지만 묘하게 활력이 느껴지는 곳,
가오슝 중심부에 있는 중앙공원이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대만 남부의 대표 도시라는 타이틀에 비해, 이곳의 분위기는 늘 한 박자 느긋합니다.
그 느긋함이 오히려 도시를 숨쉬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앙공원은 우리나라에도 한강, 분당, 평촌, 부천 등
웬만한 도시마다 하나쯤은 꼭 있는 ‘도시형 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관광객을 위해 꾸며놓은 장소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매일같이 드나드는 생활의 한가운데였기 때문입니다.

가오슝 중앙공원 역시 ‘굳이 찾아갈 명소’라기보다

‘그냥 그 자리에 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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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찍한 잔디밭과 연못, 그늘을 넉넉히 만들어주는 나무들이 공원 곳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열대지방답게 공원 안에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나무들도 여럿 보였습니다.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 이리저리 뒤엉킨 채 자라고 있는 모습은

마치 생명력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 같았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풍경을 만난다는 게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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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생명력을 과시하듯 여러 갈래의 뿌리를 사방으로 뻗고 있는 나무.

바닷물에서 자라는 맹그로브는 익히 봤지만,
이렇게 땅 위로 뿌리를 드러내며 자라는 나무는 처음이었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찾아보니 이 나무의 이름은 반얀나무.

뱅갈고무나무, 혹은 뱅갈 보리수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학명은 Ficus benghalensis.
분류를 따라가다 보니
진핵생물역, 식물계, 관다발식물군…
속씨식물군,진정쌍떡잎식물군,

장미군,장미목,뽕나뭇과,

무화과나무속,반얀나무... 끝이 없습니다.
핵핵…ㅎㅎ


하지만 복잡한 분류보다도
이 나무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나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붙잡고 스트레칭을 하거나, 아예 뿌리에 걸터앉아 다리 운동을 하는 모습까지.

나무는 배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편입된 도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똑같이 따라 해봅니다.
잠시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이 된 기분으로.ㅎㅎ


20231030_162920.jpg 자연 헬스장?


20231030_163031.jpg?type=w1600 현지인처럼 따라해보기ㅎㅎ


햇볕이 강한 남부 도시답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무 아래로 모여듭니다.

노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어린 아이들이 있는 주부들은 육아이야기를 나기도 하겠죠?

애견인들은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 사회성을 길러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풍경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의 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하지 않음’이야말로 여행자에게는 한순간 마음이 느슨해지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가오슝이라는 도시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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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쪽에서는 할아버지들이 모여 카드놀이에 한창입니다.

예전에는 마작을 많이 했을 법한데
요즘은 카드놀이, 장기, 바둑 등으로 모습이 조금씩 바뀐 듯합니다.

시간이 흐르며 놀이의 형태는 달라져도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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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릅니다.
왕, 말, 상, 포, 졸… 이름은 익숙하지만
판의 구성과 말의 이동 경로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한참을 기웃거리며 구경했는데 룰은 끝내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포가 다른 말을 하나 뛰어넘어 상대 말을 잡는 방식은 우리 장기와 비슷하더군요.

아래 사진 속 아주머니는 놀라울 만큼 공격적인 수로 순식간에 판을 끝내버립니다.
괜히 주변에서 탄성이 나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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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df86ac99-7cf0-4475-9a99-f1ed0380999b.jpg?type=w1600 날아갈 듯한 건물은 중앙공원에 붙은 중앙공원역이다






지하에서 만난 또 하나의 얼굴, 미려도역


중앙공원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
혹은 천천히 걸어가도 닿을 수 있는 곳에 미려도역이 있습니다.

역사 안의 화려한 예술 작품 덕분에 많은 여행자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명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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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려도역 입구와 유리천장


미려도역은 가오슝 지하철 레드라인과 오렌지라인이 교차하는 환승역입니다.

부산의 서면역이나 대구의 반월당역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하지만 지상 출입구만 보고는 이 안에 그런 공간이 숨어 있으리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역 안으로 들어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춥니다.

천장을 가득 채운 ‘빛의 돔’.
유리와 색, 빛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지하철역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만듭니다.


6c7fa234-4d47-4383-a020-6f29b3b74886_orig.jpg 화려한 유리 천장과 색채가 인상적인 빛의 돔(Dome of Light) 모습


미려도역은 미국의 여행 웹사이트 'BootsnAll'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두번째로 아름다운역'이라고 하는군요.

역사내의 '빛의 돔'은 이탈리아 예술가가 4년 반에 걸쳐 만든 예술작품인데

매일 정해진 시간(하루 3번~5번)에 3분간 라이트 쇼가 전개됩니다.


라이트 쇼 시간이 되면 단체 관광객들도 하나둘 모여듭니다.

조명이 꺼지고, 빛이 천장을 따라 흐르다 마지막에 환하게 밝혀지는 순간.

여기저기서 동시에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도 오후 5시 무렵 도착해 그 3분을 함께 했습니다.

짧지만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기분 좋은 깜짝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SE-579cb265-1d57-4ec8-a3bb-2a7906722a24.jpg?type=w1600 낮과 밤, 각도에 따라 색감과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


미려도역이라는 이름은 1979년 가오슝에서 일어난
대만 민주화 운동, ‘메이리다오 사건’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메이리다오(美麗島)는 포르투갈어 '포모사(Formosa)'에서 비롯된
타이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천장 아래에서 이 공간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떠올리니
이 역은 단순히 ‘예쁜 장소’ 이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세계에는 아름다운 지하철역이 많지만, 미려도역 역시

한 번쯤 일부러 들러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중앙공원에서 미려도역까지의 이 짧은 동선은 가오슝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조용하고, 또 얼마나 단단한 일상을 품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산책로이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대만 가오슝 한달살기 중(2023년 가을), 가족 카페에 실시간으로 남겼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생각'을 때때로 덧붙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