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터널·해변·포토 스폿까지, 느리지만 알찬 치진섬 한 바퀴
[호]
페리를 타고, 치진섬으로
오늘은 가오슝에서도 여유로운 바닷가 동네이자,
도심에서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휴양형 섬으로 알려진 치진 섬(旗津島, Cijin Island)을 다녀왔습니다.
치진섬은 보얼예술특구에서도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이라,
직선거리로는 500m 남짓밖에 되지 않습니다.
가오슝에 머무는 동안 항구를 오갈 때마다 늘 시야에 들어오던 섬이었고,
‘언젠가는 꼭 가야지’ 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치진섬으로 가는 구산 페리 선착장은 보얼예술특구 숙소에서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 거리입니다.
항구 도시 가오슝에서는 이동 자체가 여행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페리 선착장 바로 옆에는 며칠 전부터
대만 해군의 대형 군함 한 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자동차와 비교해보니 규모가 짐작이 가는데, 대략 5~7층 아파트 높이는 되어 보였습니다.
페리를 타고 이동하며 바라본 날렵한 옆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국과의 양안관계가 좋지 않은 시기라,
가오슝항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가오슝항은 생각보다 훨씬 큰 항구입니다.
거대한 컨테이너선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도시가 왜 ‘항구 도시’로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가 됩니다.
짧은 페리 이동이지만, 바다 위에서 바라보는 가오슝의 풍경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치진섬'은 읽을 때마다 자동으로
'지친섬'으로 읽힙니다. 착시 현상이겠죠?
아래 사진이 비빔면으로 읽히듯이. ㅎㅎ
페리를 탔는가 싶더니 어느새 치진 섬 선착장에 도착합니다.
원래 승선료는 30위안인데,
이지카드를 사용하니 20위안(한화 약 800원)만 결제되었습니다.
뱃삯마저 부담 없는 여행입니다.
선착장 앞에는 치진섬의 주요 이동수단인 자전거와 스쿠터 대여점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섬이 길쭉한 형태라 자전거나 스쿠터로 한 바퀴 도는 여행도 많이들 한다고 합니다.
날씨도 무덥고,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의 관광객이 자전거나 전기 스쿠터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 역시 가장 느린 교통수단인 ‘뚜벅이’로
치진섬을 천천히 걸어보기로 합니다.
오늘의 도보동선은 치진 선착장에서 출발해 가오슝 등대로 올라간 뒤,
등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치진 스타 터널까지 걷고,
터널을 지나 해변의 선셋바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이후 해산물 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해수욕장을 끼고 섬 남쪽 끝에 위치한
무지개 교회까지 걸어간 뒤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코스입니다.
총 도보 거리는 약 6~7km,
난이도는 중·하,
휴식과 식사를 포함해 약 6시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땀과 바람, 가오슝 등대
본격 탐사에 나서기 전,
커피와 우롱차로 더운 날씨에 뚜벅이를 해야 할 심신을 잠시 달랩니다.
관광지임에도 로컬 생활감이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골목들을 지나
가오슝 등대를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등대까지는 계속 오르막입니다.
11월 초인데도 한낮 기온은 30도 안팎,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천천히 올라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오슝 등대가 ‘짠—’ 하고 눈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치진 등대가 아니라,
가오슝 항을 지키는 가오슝 등대입니다.
1883년에 처음 세워지고,
1918년에 재건축 된 오래된 등대라고 합니다.
치진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섬과 가오슝 항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오르막의 수고가 충분히 보상받는 순간입니다.
터널과 해변, 선셋바의 여유
등대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해안도로를 끼고 치진 스타 터널까지 걸어갑니다.
치진섬은 길쭉한 형태지만, 볼 만한 곳들이 등대를 중심으로 모여 있어
뚜벅이 여행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바닷가에는 제주도 월령 해안처럼 선인장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고,
곳곳에 활짝 꽃을 피운 모습도 보입니다.
치진 스타 터널(旗津星空隧道)에 도착합니다.
특별히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무더운 날씨 속에서 터널 안은 그저 반갑고 시원합니다.
이 터널은 일제강점기 시절 만들어진 군사용 터널을 2005년 관광용으로 정비한 곳입니다.
내부에는 별이 쏟아지는 듯한 LED 조명과 빛으로 꾸며진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에
별처럼 빛난다 하여 ‘별 터널’로도 불린답니다.
터널을 지나 야자수 사이로 이어진 해변 데크길을 따라가니
치진 해수욕장입니다.
동남아의 여느 해변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치진 해수욕장은 제주 삼양해수욕장처럼 검은 모래사장을 가진 곳입니다.
햇볕 아래 반짝이는 모래와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멈춤의 여유를 누립니다.
무지개 교회와 섬 한 바퀴 마무리
점심은 해산물 거리에서 해결하고, 다시 해변을 끼고 걷습니다.
관광객들은 걸어서, 혹은 전기자전거를 타고 각자의 속도로 치진섬을 즐기고 있습니다.
걷기 좋은 한적한 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30여분쯤 걸었을까요.
드디어 치진섬의 대표적 포토 스팟인
무지개 교회에 도착합니다.
실제 교회는 아니고, 한 웨딩업체가 웨딩 사진 촬영을 위해 만든
세트장 같은 공간이라고 합니다.
오후 4시부터 6시 사이에는
실제로 신랑신부가 촬영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관광객이 많은 날에는 30분 이상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장소라는데,
이날은 유난히 한적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한 장 남겨봅니다.
치진섬 최고 인기 명소에 이렇게 사람이 없으니
우리라도 무지개빛 추억을 남겨봐야겠죠.
비록 ‘헌랑헌부’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
그렇게 치진섬에서 걷고, 쉬고, 다시 걷다가
해 질 무렵 선착장으로 돌아와 페리를 타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섬을 한 바퀴 다 돌아본 것은 아니지만,
치진섬이 가진 분위기와 속도는 걸은 걸음만큼은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
언젠가 오후 늦게 다시 시간을 내어
치진섬의 유명한 일몰을 보러 한 번 더 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득 그리스 산토리니,이아(Oia) 마을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일몰 풍경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결국 이번 여행에서는 치진섬의 일몰을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저녁 관광이 꼭 필요한 일정이 아니면
자연스레 우선순위에서 밀려납니다.
낮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게 되는 변화랄까요.
‘나이 듦’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보면 마냥 부정할 수도 없겠습니다.
대신 며칠 뒤, 낮의 치진섬을 다시 한번 찾았습니다.^^
*이 글은 대만 가오슝 한달살기 중(2023년 가을), 가족 카페에 실시간으로 남겼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생각'을 때때로 덧붙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