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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꾹꿍 Jan 11. 2016

삶과 죽음

책속에서 얻은 지혜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


오늘은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바로 죽음 (death)에 관해서이다.


얼마전 방송에서 암 4기 환자들에 대한 다큐 '앎'을 보았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내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삶의 본질에 대해 깨닫지 못했을 거예요.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했을 거예요. 순간순간에 감사하며 살지 못했을거예요.'


살아있는 동안에,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너무도 뚜렷하게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는 어느날 루게릭 병에 걸리게 된다. 조금씩 몸이 굳어가면서 점점 죽음과 가까워지는 모리는 삶이 무엇인지 더욱더 명확히 알게 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된다.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벗겨내고 결국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모든 일들이 아주 다르게 보인다네.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끝이 있다. 시작과 끝이 있기에 인생을 여행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더 많이 가지고 ,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어쩌면 나를 스쳐가는 하나의 허상일 뿐이라는 것. 그 허상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셸리 케이건 교수가 쓴 책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1/5 지점에서 책을 덮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기일전하여 다시 끝까지 책을 읽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지, 영혼은 영원한 것인지, 죽는다는 건 무엇인지, 그리고 과연 나는 누구인지 가설을 세우고 철학적으로 분석해 나간다. 곰곰히 생각하며 책의 흐름을 따라갔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죽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고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살고 싶은가? '영원히' 산다면 지겹지 않을까? 영생이 최고의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예전에 '별에서 온 그대'의 김수현은 외계인으로 영생의 삶을 살았다.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계속 신분 세탁을 해가면서 살아간다. 이번엔 변호사로, 다음엔 의사로 계속 직업과 이름을 바꿔가며 산다. 그렇게 사는 인생은 어떨까?

 

'다시 20대로 돌아갈래?' 라고 물으면 다들 손사래를 친다.

'아휴 힘들게 다시 공부하고 시험보고 취직하고..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해요.'

예능 '꽃보다 누나'에 나왔던 윤여정씨에게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니

'그 힘든 세월을 다시 살라고? 난 지금이 좋아.'

사람은 어쩌면 오래~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닌 거 같다. 끝이 두렵긴 하지만 끝이 있기에 삶 자체가 아름답다.


* 책의 저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삶이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빨리' 찾아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신중하게 살아가야 한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사는 것이다.


이 책으로부터 배운 것은 죽음이 꼭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삶을 더 가치있고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을 인지했을 때 어떻게        .


나의 죽음에 대해서만 고찰하지 말고 더 넓혀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인지한다면 더욱더 의미는명확해진다. 신달자님의 '엄마와 딸' 이라는 책에서 엄마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 있다.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라. 엄마가 딱 심장이 멈추고 눈을 감고 영원히 일어날 수 없고 곧 몸이 식고 땅에 묻히고 썩고 그리고 한 줌의 흙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그때 엄마가 보인다. 엄마가 얼마나 딸을 위해 전전긍긍 자신의 힘을 달달 긁어모아 무엇인가 보탬이 되려고 했는지를.  이것은 너무나 큰 모순이다.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엄마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 어떤 표현으로도 불가능한 죽음 이후에 엄마가 보이는 것은 인간이 겪는 가장 큰 불행이다

 - 엄마와 딸(신달자)


이 글만 읽었는데 가슴이 에이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당장 엄마에게 달려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부재, 그들과의 이별을 생각해야 되는 이유는 그들을 잃고 나서 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더 따뜻하게 하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이다.


당장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내가 하루를 맞이하는 자세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비좁은 마음을 여실히 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 결론은 사랑이다.

유한한 삶을 무한하게 해주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랑. 사랑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안녕 헤이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두 어린 남녀의 사랑. 남자주인공인 거스가 헤이즐에게 고백하는 내용이다.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고 망각은 피할 수도 없고
  우리 모두 언젠가 죽게되는 바로 그 마지막날
  우리가 했던 것들이 다 먼지로 돌아간다해도
  또 태양이 우리가 살았던 이 지구를 삼켜버린다고 해도
  널 사랑해                                                                                                                                                                                                    


* 사랑이랑 우리가 이 세상을 뜬 후에도 그대로 살아 있기 위한 방법이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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