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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꾹꿍 Dec 16. 2015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셀프 난임 치유기

    

막연하게 어느 땐 아이가 갖고 싶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을 때, 좌절했고 집착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 키운다는 것은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옆에서 지켜보며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수 없다고들 말한다.


가끔 친구의 아이나, 조카를 볼 때 한 두시간만에 지치게 된다. 잠시 보는 것은 끝이 있다. 그리고 피할 수 있다. 즐겁게 놀다가 아이가 나를 힘들게 하거나, 갑자기 울게 되면 엄마에게 보내면 그만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엄마가 되면, 나는 피할 곳이 없어진다. 힘들다고 그만 둘 수도 없게 되고 나를 전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친정엄마에게 매달리게 된다.

더 이상 쉴 수 가 없다.    


김혜남의 ‘어른으로 산다는 것’을 보면, 사랑의 감정은 늘 미움과 함께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남녀 사이의 사랑 뿐 아니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도 해당된다고 말한다.    



아이는 엄마의 사생활을 방해한다.

아이는 무자비하며, 엄마를 마치 무보수의 하녀나 노예, 하층민처럼 취급한다.


아이는 대부분 배고프거나 뭔가가 필요할 때 엄마를 무지 사랑한다. 그리고 일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 귤껍질처럼 엄마를 던져 버린다.


아이는 엄마를 의심하고, 엄마가 주는 음식을 뱉어 버려, 엄마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회의감이 들게 한다. 그러다가 이모나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은 잘 받아 먹는다.


아침에 한바탕 끔찍한 난리를 친 뒤 밖으로 안고 나가면, 아이는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웃는다. 그러면 그는 “참 예쁘고 착한 아기네요”라며 아기를 쓰다듬어 준다.


만일 처음에 아이의 비위를 잘 맞춰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엄마를 두고 두고 원망한다.    




이 내용을 보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 내용이 조금은 자극적으로 쓰여있기는 하나 사실인듯 싶다.

여기 써있는 '엄마'라는 존재가 너무 가여워서 꼭 끌어 안아 주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내 사생활.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혼자 일기를 쓰는 시간.  조용히 영화를 보고, 명상을 즐기는 생활은 어찌보면 아이를 낳는 순간 끝!이다. 또는 아주 한참 뒤에야 그런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친구가 카스에 ‘책을 읽고 싶은데 지금은 보지 못한다’고 썼다. 나중에 볼 거라고.

책을 보는 것이 암벽등반을 한다거나, 요트를 타는 것처럼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든 앉을 의자, 아니 서 있을 시간만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엄마는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슈퍼맨에서처럼 그리고 귀여운 것만 카스에 올리는 친구들을 보면, 아이를 낳는 것이 엄청나게 행복한 일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분명한 것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한 인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엄마의 절대적인 희생으로 이렇게 자랐다. (이 사실을 내가 애를 키워봐야 더 와 닿고 감사한 마음이 들겠지)


내가 엄마를 보듯.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꿈을 가진 여자, 꾸미는 여자, 자기 시간을 갖고 싶은 여자가 아닌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 와주고 나를 위해 희생해주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에게 밥을 차려주고 방도 치워주는 그런 엄마.

그럼에도 그런 희생이 이제껏 당연하다고 느껴온 시간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내 자식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 반, 원망하는 마음 반.     


사랑은 미움과 함께 동반한다고 하니, 아이가 주는 기쁨에 이면에는 희생, 미움, 원망도 함께 할 것이다.     


아이를 낳을수만 있다면 현실만족의 갈증에서

벗어나 무조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대단한

착각임을 발견했다.


그 이면의 고통까지 감내할 어른이 된다면

지금의 시간도 감사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친구는 말해주었다. 아이를 보면 내가 여기까지

행복해 질수있구나 알게된다고.

반대로 여기까지 힘들수도 있다는 것도 같이

알게된다고..

인생의 희노애락. 기쁨의 최대치가 커지고, 슬픔최대치도 커지는 것이 아마도 육아

보다.

'당신은 날 키우면서 기뻤잖아요 행복했잖아요. 그러니 힘든 것도 겪어야 되요.'

인생은 늘 패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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