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마의 글공간
8장 - 죽음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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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지인이 죽었을 때 그것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우린 수없이 많은 죽음들을 타에게서 들으며 알아간다.
그리고 무의식은 항상 죽음과 관련되고 생존에 대한 열망을 끊임없이 원하며 죽는다는 것을 견제한다.
자살, 사고, 타살, 자연사 등 죽음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그 속에서도 수없이 많은 갈래로 죽음의 종류가 나누어진다.
죽는다는 것은 아주 쉽다.
반대로 누굴 죽이는 것도 아주 쉽다.
인간의 신체는 동물들 중에서도 환경에 대한 생존은 무언가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죽음에 취약한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죽음은 항상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인간이 죽고 있지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건 그만큼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지는 현대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다. 이는 출산과 관련한 내용이기에 생략한다.
왜 인간은 유독 죽음과 가까울까?
동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에 대한 열망이 인간보다 강하다.
먹고 먹히는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은 감각을 엄청나게 높여준다. 항상 경계하고 신체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존재하며 먹는 행위는 살기 위한 영양분 섭취일 뿐이다.
반대로 생태계의 상위에 위치한 인간은 도구로 식량, 환경을 조성하여 안전을 보장받기에 그 감이 많이 무디다고 할 수 있다.
혹시 타인의 목을 손으로 감싸본 적이 있는가?
혹시 본인의 손목을 날카로운 도구로 대본적이 있는가?
끝도 없이 신체를 단련한 무술가가 아니라면 아마 죽음이라는 것이 아주 쉽구나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반대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 또한 아주 쉽다는 것이다.
그렇듯 당신과 나의 죽음은 항상 곁에 있으며 무뎌진 인간의 감은 한순간에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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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이 거쳐야 하는 죽음이지만 그것은 공포, 두려움, 어둠, 무지 등 아주 부정적이다.
영원한 생명은 없다. 시간의 개념을 뛰어넘는 생명체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인지가 없는 심해 속 생명체여야만 가능할 것이다(Turritopsis Nutricula).
숨이 멈춘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신체가 아프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알 수 없는 신체 부위가 썩는다는 것은 공포스럽다.
이렇듯 죽음이란 것이 부정적인 것은 신체의 문제, 고통과 직결되어 그것은 공포, 무서움, 두려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인간, 동물의 몸은 태어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몸이 자라나는 과정을 거쳐 가장 강하고 건강한 최상급의 신체 상태를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점점 신체는 다시 퇴화되고 노화되어 몸이 약해지는 과정을 거쳐 죽음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어떤 인간도 거절할 수 없으며 이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한다.
몇몇 동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서의 독립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절대로 보호가 없다면 생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유아기, 유년기, 노년기 등 신체적으로 약할 때 부모 외에도 사회적으로 보호하여 인간의 사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
당연히 죽음은 고통이고 두려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회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조심해야 하는 것, 피해야 하는 것, 항상 확인해야 하는 것 등으로 우리는 신체의 활동이 영원히 멈추는 것을 방지한다.
반대로 항상 죽음은 가까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지만 죽는다는 것은 배제하고 전재로 깔아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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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신체의 고통과 아주 가깝다.
병으로 아주 아프거나, 사고로 신체가 다쳐 아프거나, 숨이 멈추는 고통을 받거나 무엇이든 아픔 후에는 죽음이 온다고 알고 있다.
인간은 자살을 한다. 그렇다면 왜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일까?
정신적인 고통이 죽게 되는 신체적 고통을 뛰어넘었을 경우 우리는 자살에 대한 열망이 강해지며 극단적일 경우 시도하게 된다.
한마디로 삶이라는, 살아간다는 자체에 대한 고통이 죽음의 고통과 같거나 더 높다는 것이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신체가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다치는 경우 외에도 얼마든지 정신적인 타격으로도 우리는 죽음으로 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사고사, 자연사, 자살, 타살 등 수없이 많은 죽음이 이뤄지지만 우린 지금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의 죽음은 아주 많지만 내 주위에는 죽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지인들이 죽는다 해도 결국에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상관은 하지만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본인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지만 죽는다는 것을 배제하고 전재로 깔아놓지 않기 때문이다.
불치병에 걸린 시한부를 보면 불쌍해하고 안쓰러워하지만 그것은 남일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은 개인이 죽음을 준비하거나 전재로 깔아놓고 살아가라는 글은 절대 아니다.
우린 타인의 죽음을 슬퍼한다. 뉴스에 나오는 알지 못하는 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으며 드라마에서 나오는 가상의 죽음에도 슬퍼하고 가장 가까운 지인이 죽을 경우는 정말 많이 슬프게 된다.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지적인 인간은 타 생명체를 무참히 죽이면서도 같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한적으로 관대하다. 타 생명체는 무참히 죽이면서도 같은 인간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서는 무한적으로 질타하고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타 생명체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이 다른 취급인 왜 다른 것일까?
사회 유지의 필수 요소인 인구 유지 때문이다. 타 글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 생명체를 그렇게 많이 죽인 인간의 죽음은 애도, 장례, 제사 등을 통해 특별한 의미로 만든다. 그리고 어떻게 죽었느냐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계층별로 적절한 인구 수준이 필요하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은 살아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인식을 심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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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통보다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
불치병 환자로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
정신적인 병으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
신체적 장애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
생계유지의 고통으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 등등
이들을 사회의 기준대로 치료하고 재활하고 도와야 되는 대상이며 삶을 붙잡도록 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죽음을 선택하게 만드는 숙주에 대한 개선, 치료, 재활, 개입의 논의와 실행은 이루어지는데 왜 죽음에 대하여는 무조건적으로 막으려고만 하는 것일까?
여전히 기준은 살아야 되는 것이며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니고서는 본인이 절대로 선택해서는 안되는 금기일까?
아름답게 본인의 선택으로 죽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름답게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할 수는 없는 것일까?
죽음에 대하여 많은 고민들을 해오고 사회와 그 고민들을 함께 나누어 왔다면 억지로 죽음을 선택하려고 하지도 않지 않을까?
죽음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
이다음 글들이 죽음으로 인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 역시 죽음으로 이 글을 보러 다시는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문구에서 기분이 나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죽음은 신이 관장한다는 말이 있다.
본인의 선택도 아닌 타인의 선택도 아닌 신의 선택에 달렸다고 하는 말이다.
그만큼 죽음은 환경, 나이, 상황 등을 모두 배제하는 언제 올지 모르는 알 수 없는 비밀이다.
죽음을 선택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에게나 항상 곁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의 어느 시기에라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과연 우리는 언제, 어느 순간에, 어느 시기에, 어떻게 죽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