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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탕상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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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할무니 Jul 18. 2019

두 얼굴의 차이나, 맛이차이나

탕상수첩, 열세 번째 기록

삼시 세끼를 정석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지가 십수 년, 한 끼라도 거를라 치면 어디에 문제 있는 건 아니냐며 보내는 걱정 반, 관심 반 눈초리들 덕에 결국 피할 수 없는 식사자리를 마주하게 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며 자기 최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내 밥 내가 챙겨 먹을 권리, 먹고 싶지 않을 때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고집, 함께 하자는 말을 호기롭게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에도 소용이 없어 정말이지 즐기는 수밖엔 다른 방법이 없는 그 순간이 오면, 위기의 순간을 대비해 바지춤에 숨겨둔 날붙이를 상대방 앞에 쓱 꺼내 보이는 것처럼, 배수의 진 같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다른 생각 하나 없이 그저 먹을 거에만 코 박고 몰두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음식이 필요하게 된다.


누가 알겠는가. 만족스러운 식사와 넘치는 포만감이 사실 의도된 연출이었단 사실을.


물론 아무도 모르게 수를 썼으니 아는 게 더 힘들겠다만, 맛은 시야를, 포만은 정신을 한 꺼풀 덮고 사람과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야기의 변화에 둔감하게 만든다. 버티고 견뎌도 모자랄 판에 무방비로 혓바닥을 난자당하다 보면 어느새 사실은 잊은 채 맛에만 정신을 놓고 오게 되는 이치랄까. 이 모든 건 내가 의도한 작업이라는 것, 그리고 이 작전에 걸려들었을 누군가를 보며 크게 만족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만족과 함께 들어오는 맛의 향연들이 어우러져,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차이나는 맛을 만들어내게 된다.



탕수육 소, 음메, 소자는 나의 실수,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 어머니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아무런 주문도 없었는데 탕수육이 찍먹으로 나왔군. 설상가상이라고 스트레스가 오려면 이렇게도 오는구나 싶었다. 내 입에 넣기 전까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건 그저 옛 일이라고만 생각한 나 자신이 한스럽다. 나이 먹어도 바뀌는 거 하나 없는 걸 보면,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는 역시 진리구나.

실수에서 배우기는 하는데, 그게 제대로 된 배움이 아니다 보니 같은 실수는 아니어도 다른 실수를 계속 저지르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에 빠져버리게 된다.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은 그럴 줄 알았으니 옳은 방향으로 미리 정렬하지 않는 이상 그냥 알기만 했던 것에서 끝이다. 이번에도 알았지만, 그게 다였던 것처럼.


탕수육은 언제나 대자로 시키는 게 옳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왜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는지.


탕수육 한 점 먹을라 치면 좌우 동공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르게 굴리면서 상대방 심리의 빈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사람이 4명이라면 2~3점, 3명이라면 3~4점, 누구 코에 붙일 만한 양이 아닌 건 분명하니까. 맛이라도 없던가. 맛이 있으니 소자를 시킨 내 잘못은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크림새우, 6미, 누룽지 침대


다행히도, 크림새우에는 정확하게 6미, 8미, 10미라는 기준이 세워져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나는 군대 체질인 것 같다. 기준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주문에도 거침 없어진다. 뭐,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도 내 결정에 한몫했겠지. 누룽지 침대에 몸을 웅크린 어린아이 같은 모양새이지만, 한 젓가락 훑어보면 이내 그 생각은 사라진다. 둔턱함을 기대한 라이트헤비급의 주먹이 깃털처럼 가볍게 훅훅 들어오는 것처럼, 시각으로부터 기인한 기대와 미각에서 오는 현실감 사이의 괴리가 존재한다. 그 차이는 두 가지 모두 옳은 방향이라면 시너지를, 그렇지 않다면 혐오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 새우는 전자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가벼운 느낌의 크림. 지금 생각해보니 튀김에 크림을 끼얹었으니 느끼함으론 천하제일을 다툴 것 같지만 산뜻한 맛을 느꼈다는 기억이 남은 걸 보면 그건 크림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늘 의심하고, 고민하자. 이러다 보니 실수는 뒷전으로, 배움은 의심이란 포댓자루에 쓸어 담기는 거겠지.



해물누룽지탕, 이것은 용암탕


공부가주, 500ml, 공부하자


그래. 중식 하면 술이고, 술 하면 공부가주고, 공부가주 하면 누룽지탕이 빠질 수 없지! 라며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내린 결론은 결국 용암이다. 이건 용암이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 앞에 의심과 고민은 그저 사치일 뿐. 위장을 더 괴롭힐 수 없어서 고안해낸 아주 가학적인 고문, 인지하지 못함을 빌미로 펄펄 끓는 용암을 아침 점심 저녁 위장에 들이붓는 행위를 중단하자. 위를 소독하겠다고 매일 저녁을 술로 달래는 이 병리적인 행위를 중단하자.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거 아님을 인정하자. 언제나 내 몸처럼, 아니, 정말 내 몸이니까, 내 몸을 내 몸처럼 잘 돌보자. 내 몸을 내 몸처럼 아끼자. 사랑하자.



어향가지, 어항에 한가득 가지를 넣고 튀기고 볶은 것이다.


어향가지 어향가지 누가 지었나, 누군가 지었지.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술을 떠난 말과 두 귀에 들려오는 말 모두 한결같이 어화둥둥 어향가지스럽다. 힘없이 뿌리내린 것은 쪽파인가. 여름이라 듬성듬성한 쪽파 이불 사이 속살을 드러낸 어향가지가 오늘따라 귀여워 보인다. 가지의 운명일까. 바삭을 최고의 가치로, 엄격한 잣대 속에서 힘겹게 목숨줄 연명하는 탕수육과는 달리, 우리 가지는 그저 평온하게, 본인의 존재감을 한없이 드러내면서, 누군가의 감시와 처벌의 대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저 자유롭게 맛을 뽐낸다. 가지가지하는 어향가지, 참 맛있는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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