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상수첩, 세 번째 기록
춤. 두 어깨와 무릎이 그래선 안 될 방향으로 마구 뒤틀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현상의 근원은 내 몸. 더 놀라운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현상이 목격됐다는 거다. 그래선 안 될 게 분명한데, 어쩌자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무엇이 내게 그래선 안 될 것을 그럴 수 있게 만들었는가.
롤플레잉 게임처럼 캐릭터 위에 닉네임이 뜨는 게 아니라면 현실 세계에서는 나를 드러내기 위한 일련의 작업들이 필요하다. 근데 이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시간으로 환산하기는 어렵겠지만, 한평생 자기소개에 쏟는 시간을 합치면 ‘아, 이래서 유명해져야 하는구나’ 싶을 거다. 아무튼, 옅어진 존재성만큼 강한 자기주장이 필요한 요즘, 누군가에게는 학벌이, 또 누군가에게는 외모가, 돈이, 명예가, 실력이, 자기주장의 척도가 된다. 사실 존재성이라는 것은 결코 정량화될 수 없는 것으로 섣불리 서로의 기준을 평가했다간 큰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무릇 세상에 나왔으니 이름 한번 떨치고 가야지라는 부푼 꿈이 아니라, 단순하게 나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이라고 보면, 범람하는 관계 속에서 나를 드러내는 여러 방법 중에서도 ‘음악’은 단연 발군일 것이다. 특히 듣는 즐거움과 함께 보는 즐거움까지 곁들일 수 있는 ‘공연’이라면 얘기가 더욱더 쉬운데, 그 안에서만큼은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평소보다 더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납득할 수 있다. 내 몸에서 관찰된 그래선 안 될 장면들이, 나 말고도 누군가에게서 목격된 그 광경이, 그래선 안 될 게 아니라는 것을.
영화장의 탕수육은 특별하지 않다. 심히 무난하면서도 톡톡 튀지 않는 맛, 담김새, 향. 자고로 먹고 싶게 만드는 음식은 그 향부터 강하게 후각을 자극하는데, 영화장 탕수육은 단연코 그렇지 않다. 평범함의 극치, 근데 이렇게까지 평범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특별하다. 갑자기 언니네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보통이라는 단어에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를 붙일 발상을 했다는 게 새삼 놀랍다. 아마 영화장 탕수육을 먹어봤을 게 분명하다.
아니, 이렇게 보니 탕수육은 굉장히 평범한데 테이블보가 정말 비범하다. 경양식 돈가스를 썰어야 할 것만 같은데 탕수육이 올라가 있으니 이런 게 바로 인지부조화인가 보다.
깔끔하게 잘린 탕수육 단면을 보고 있노라면 내 치열이 얼마나 고른지 확인할 수 있다. 고른 치열을 갖고 태어나게 해준 정애와 봉순이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저렇게 깔끔하게 탕수육을 자를 수 있었던 이유는 내 고른 치열의 덕도 있겠지만 고기의 부드러운 식감이 더 한몫했다고 본다. 뭐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배달요리로는 부드러운 탕수육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사실 여부는 조사해봐야겠지만 탕수육에 강냉이가 털렸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니 말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탕수육 먹는 데 동참한 사람이 있다면 항상 먼저 먹어보기를 권하라. 신체발부 수지부모, 건강이 우선이다.
요리사의 정결한 마음이 느껴진다. 고로 내 마음도 함께 편안해진다. 가운뎃점으로 수렴하는 군만두의 나열을 보고 있자니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놓아버린 등비, 등차수열을 다시 하고 싶은 기분이다. 요리도 과학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누군가 말했던 것 같은데, 아무도 말한 사람이 없다면 지금 내가 처음 말한 것으로 하겠다. 요리는 손맛이라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사실 그건 그 손이 저울만큼, 계량컵만큼 단련되고 정밀해졌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군만두 참 실하다. 늘 그렇지만 정성스레 빚어낸 손만두는 정말이지 모양에서부터 맛까지 빛이 난다. 맛없어도 괜찮다. 아무도 손만두를 평가절하할 순 없다. 물론 만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혹시나 하여 간장을 준비했으나 실오라기 같은 작은 맛 하나라도 놓칠까 차마 찍지 못했었다. 하지만 간장 없이 2개 이상은 못 먹는다는 사실은 만고의 진리처럼 영화장에서도 변함은 없었다. 때론 고집보다는 빠른 포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 3개 째부터 하마터면 맛없다 느낄 뻔했다. 그리 평가할 뻔했다. 신속한 판단으로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늘 이런 식이다. 탕수육 먹고, 군만두 먹고, 뭐 먹고, 또 뭐 먹고.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간짜장 주문하면 배불러서 그 맛을 다 못 즐기게 되는 불편한 상황. 왜 하늘은 탕수육, 군만두, 간짜장을 모두 낳으시곤 인간에게 하나의 위만 주었는가.
한 살 두 살 사회와 동화될수록 타인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건 점점 어려워진다. 이것은 비단 사람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문화, 음식 모두에 적용되는 사항인데, 이거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기에 주관, 고집이라는 단어들로 점철되는 상황 속에서, 사회에 함몰된 모습이 아닌 ‘진짜’를 보여주기 위한 작은 몸부림, 그래선 안 될 것을 그럴 수 있는 것으로 변모시키는 것들은 그것이 인위적이건 그렇지 않건 언제나 나를 흥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