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나의 달리기 이야기
작년(2020년) 9월부터 막내 녀석도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드디어 오후에 약간 운동할 시간이 생겼다. 그래 보았자 아이들이 3시면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돌아오기 때문에 잘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 약간의 시간이 생기는 것이 고작이지만. 물론 한국에서 일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평일 오후 1~2시에 집에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긴 하다.
사실 하고 싶거나 배우고 싶은 운동들은 많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그저 동네를 달릴 뿐이다. 한 시간 남짓 10km 정도를 뛰는데 달리고 있다 보면 매번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하프마라톤을 뛰었던 것이 생각난다.
1996년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그 나이 또래의 한국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킬로미터 단위로 달려 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96년이 내가 다니던 학교의 개교 3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같이 붙어있던 고등학교와 함께 개교 30주년 기념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학교를 출발해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를 달리다 방향을 틀어 꽤나 험난한 언덕을 통과하여 다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의 길을 돌아오는 코스였다(나중에 지도로 거리를 계산해 보니 약 7km의 거리였다).
모든 학생들이 다 뛰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쨌든 운동 신경이 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나는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생각해서 참가를 결정하였다. 그런데 막상 행사날이 다가오자 '마라톤'이라는데 과연 내가 다 뛸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대회 전 날 연습을 한답시고 집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아랫집에 엄청난 민폐였을 듯).
드디어 개교 30주년 마라톤이 벌어지는 날이 밝았고 나는 자신 있게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오래되어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하나는 ‘딸깍 고개’라고 불렸던 드림랜드 후문의 언덕이다. 강북 지역 학교들의 소풍 명소였던 드림랜드(지금은 무슨 공원이 되었던데)의 후문 언덕은 그 가파름으로 악명 높았다. 대회 전부터 선생님들이 이 언덕이 무척 힘들 거라고 했는데 역시 장거리를 한 번도 뛰어 본 적이 없는 내가 그 언덕을 달려서 통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어느 정도 뛰다가 힘들면 걷자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 언덕이 나오자마자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려서(여기가 코스의 딱 절반) 어쨌든 언덕을 넘어야만 했다. 결국 이때부터 걷기 시작해서 어떻게 어떻게 학교까지 겨우 찾아갔다.
두 번째 기억은 학교에 다 도착해서 발생한 일이다. 설립자가 대학교를 지으려다 실패해서 만든 우리 학교는 워낙 부지가 컸기 때문에 학교 정문을 통과하고도 한참을 달려야 결승선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래도 정문을 통과하니 끝이 보여서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서 앞에서 달리고 있던 사람을 추월하려는 순간 결승선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래도 엄연히 '마라톤 대회'였던 만큼 들어오는 순서에 따라서 번호표를 주었는데 내가 들어가는 순간 결승선에서 번호표를 주던 형들이 나를 가리키며 '쟤야 재야 쟤, 걔 말고 쟤한테 이거 줘'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 사람을 추월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사람보다 늦게 들어온 것이 되었다.
'내가 분명히 추월했는데 이게 뭐야'라고 생각하면서 번호표를 보니 '96'이라고 쓰여있었다. 몇 명이 함께 뛰었는지는 모르지만 전교생 900명 중에서 1/3 ~ 1/2이 뛰었다고 한다면 그리 잘했다고는 할 수 없는 등수였다. 대회가 끝나고 시상식을 했는데 물론 1, 2, 3등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개교 30주년이니 30등에게도 선물을 주었고, 1996년이었으니 96등에게도 선물을 주었다. 아마 보잘것없는 선물이었나 보다. 무엇을 받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을 보면.
비록 10km도 되지 않은 짧은 거리였지만 어쨌든 마라톤을 뛰었다는 자신이 들어서였을까. 몇 달 후 텔레비전을 보다가 서울 국제 하프 마라톤 대회의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회는 일반인도 참가할 수 있었는데 참가비는 단 돈 3000원이라고 광고를 했다. 참가비도 너무 저렴했기 때문에 나는 당장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마라톤 대회에 나가자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나와 친했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런 것을 왜 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결국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반 친구들 세 명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대회는 잠실 운동장에서 출발하여 그 주변을 달리다가 다시 잠실 운동장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마라톤이라고는 몇 달 전에 7km를 뛰어 본 것이 전부인 나는 하프 마라톤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알지 못했다. 힘들어서 언제부터 걷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너무 늦게 달렸기 때문에 중간에 대회를 위해 막았던 도로들의 통제도 모두 풀리고 말았다. 그래서 겨우겨우 걸어서 잠실 운동장 근처의 사거리에 도착한 나에게 경찰 아저씨는 짜증을 내며 저기 지하도로 건너가라고 말을 해주었다.
뒤쳐진 자의 설움을 느끼며 지하도를 건너 잠실 운동장으로 향하다 보니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후회가 되었다. 결국 쩔뚝 쩔뚝거리며 운동장에 들어온 나는 거의 2시간 40분이나 걸려서 하프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아마 모두?)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들 내가 너무 늦게 왔다며 투덜댔다. 어쨌든 몸은 힘들고 친구들에게 핀잔만 들었지만 난생처음 잠실 운동장의 잔디를 밟아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며칠 전 잠실 지하도 계단을 내려갈 때만 해도 내가 돈을 내고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을까 후회를 했지만 마라톤의 매력은 상당했다. 얼마 후 10월에 춘천에서 마라톤 대회가 벌어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도 몰래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어려서 이상한지 몰랐던)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대회였는데 그해 처음으로 일반인이 참가할 수 있게 되었고 하프 마라톤 참가비는 오천 원이었다.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붙잡고 친구들에게 함께 뛰자고 이야기 해보았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여전히 함께 뛰기를 거부했다. 오천 원은 너무 비싸다면서. 게다가 지난번 함께 뛰었던 친구들마저도 이번에는 함께 뛰기를 거부했다. 내가 너무 늦게 뛰어서 재미없다면서.
혼자라도 가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엄청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던 한 친구가 나에게 자기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그때부터 이미 배에 왕(王) 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친구였는데 본인 말로는 중학교 일 학년 때인가 방학 삼 개월 동안 운동하니까 배에 왕자가 생겼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지만 내 눈으로 그의 왕자를 몇 번이고 보았으니 믿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쨌든 그 친구가 그때부터 체대에 가려는 생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운동이 좋아서 달리고 싶어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같이 뛸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결국 우리 둘은 1996년 10월 26일 토요일,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니 어쩌면 경춘선에 몸을 실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번 마라톤 대회의 굴욕은 가슴속에 묻어두고 이번에는 반드시 두 시간 이내로 주파하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친구와 함께 출발선에 섰다. 탄탄한 복근을 자랑하는 그 친구는 시작하자마자 자기가 먼저 도착하면 결승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앞으로 치고 나갔다. 반면 나는 오버페이스는 좋지 않다는 생각으로 그저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뛰었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 이학년이면 정말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함께 달리던 사람들이 몇 살이냐고 묻기도 하고, 잘 뛰고 있다며 덕담을 해주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는 마라톤을 한다고 길을 막으니 운전자들이 짜증을 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은 차들도 많이 없었고 짜증을 내는 운전자들도 없었다. 그리고 가을 호수 주변을 도는 춘천 마라톤 코스는 주최자가 누구였든 일단 경치는 좋았다. 결국 이번에도 목표로 했던 두 시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열심히 달린 덕분에 두 시간 십 여분의 기록으로 완주를 할 수 있었다.
결승선을 통과하니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친구는 얼마나 빨리 들어왔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자기는 30~40분 전에 들어왔다고 했다. 아니 태어나서 처음 뛰어 보는 마라톤에서 중학교 이학년밖에 안된 학생이 21.0975km를 1시간 30분 만에 주파하다니! 어떻게 나와 같은 중학생이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는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는 힘들어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나에게 내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 경기장 관람석 제일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핸드폰은 물론이고 삐삐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그다음 그가 했던 말이 이상하게 평생 잊히지가 않는다. 별 것도 아닌데.
너 기다리는데 저 애드벌룬에 걸린 현수막이 계속 나를 때리더라
그러고 보니 경기장에는 '춘천 국제 마라톤'이라고 적힌 애드벌룬이 떠있었다. 바람이 조금 불었는지 풍선에 매달린 현수막이 휘날리며 그를 계속 때렸나 보다. 경기장은 넓고도 넓고, 스탠드는 많고도 많았은데 그 친구는 왜 하필 애드벌룬 밑에 서있었을까? 이유는 무척 궁금했지만 나는 '그럼 애드벌룬이 없는 곳에 서있으면 되잖아'라고 답하지 못했다.
빨리 달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런 말을 할만큼 친하지는 않아서 그랬을까?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혹은 기차)를 타기 전 저녁을 먹기 위해서 춘천 명동을 찾았다. 그때까지 춘천 닭갈비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맛있을까 싶어 찾아간 것이다. 메뉴를 보니 뼈 있는 닭갈비가 있었고 뼈 없는 닭갈비가 있었다. 둘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없어서 도대체 무엇을 시켜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뼈 없는 닭갈비가 뼈 있는 닭갈비보다 500원 비쌌다. 그래서 무슨 큰 차이가 있겠냐 싶어서 나는 500원 저렴한 뼈 있는 닭갈비를 시켰다. 주문을 받던 아주머니는 정말 뼈 있는 것을 먹겠냐고 물으셨지만 분명 비싼 것을 팔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괜찮다고 하였다.
그 친구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뼈 있는 닭갈비를 먹어보았다. 맛은 둘째 치고라도 먹는 내내 닭뼈를 발라내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생각을 하면서 춘천 닭갈비는 그저 이름뿐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다음 해 또다시 춘천마라톤을 달린 후 같은 식당에 가서 이번에는 뼈 없는 닭갈비를 주문했다. 닭갈비에 대한 나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두 번의 하프 마라톤 이후 다른 친구들 심경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두 명의 친구들이 더 합류해서 마라톤 멤버 4명이 완성되었다. 우리들은 이듬해 4월부터 2000년 3월까지 3년 동안 말 그대로 전국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하프 마라톤을 뛰었다. 나는 이 무리에 우리 학교가 위치한 동네 이름을 따서 MRS(Mia-Ri Sanai(*))라는 멋진 이름도 붙여주었다.
(*) 뭔가 오해를 하실 수 있어서 짚고 넘어가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아리는 사실 미아가 아니라 길음이었다. 길음역과 미아역은 두 정거장이나 차이가 나고 심지어 행정구역(강북구 vs 성북구)도 다른데 우리는 미아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많은 오해를 받고는 했다. 억울했다.
1996년 춘천마라톤 이후 우리는 총 7번의 마라톤을 더 뛰었는데 위에 소개한 두 대회 이외에도 잊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
한 번은 경주에서 열린 마라톤을 뛰러 갔는데 학생이라 돈이 없던 우리들은 숙박비를 아끼고자 밤 기차를 타고 경주로 향했다. 처음에는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날이 밝으면 마라톤을 뛰고 돌아오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새벽에 경주에 도착해서 보니 시간을 보내기가 마땅치 않았다. 새벽 3~4시쯤 도착했는데 대회는 10시에나 시작되니 말이다. 게다가 밖은 너무 춥고 깜깜했고, 우리는 너무 피곤했다. 결국 경기장까지 걸어가서 행사를 위해 설치해 놓았던 천막 속에 몰래 들어가 조금 쉬다가 근처 목욕탕이 문을 열 때쯤 목욕탕에 갔다.
아무리 젊었다고는 하지만 잠도 거의 못 잔 상태에서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오니 달리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다리가 풀려버리고 말았다. 마라톤은 어떻게 어떻게 완주하기는 했지만 이미 나의 모든 에너지는 소진되어 버렸다. 대회가 끝나고 기차를 타러 가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필 기차 시간은 촉박해서 친구들은 나에게 빨리 달리라고 했다. 특히 이번에도 똑같은 기록으로 완주를 해낸 복근 친구가 나를 닦달했지만 나는 정말 뛸 수가 없었다. 만약 기차를 놓치면 친구들이 엄청난 원망을 하겠지만 나는 달릴 수 없었다. 다행히 기차는 겨우 탈 수 있었지만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한 적은 지금까지도 없었다.
또 한 번은 삼척에서 벌어진 황영조 기념 마라톤에 갔을 때의 일이다. 대회 측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경기 전날 밤에 도착을 했는데 이번에도 물론 잠 잘 곳이 없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잠잘 곳에 낼 돈이 없었다). 도착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을 하긴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지난 번 경주와는 또 상황이 달랐다. 경주는 그래도 도시라서 주변에 '무엇;이라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이 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결국 아무 대책 없이 우왕좌왕하는 우리들을 보고는 누군가 불쌍하게 생각했는지 근처 학교에 들어가서 잠을 자게 해 주었다(아마 대회 준비를 위해서 학교 건물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 마라톤을 뛰어야 하는데 아침을 사 먹을 곳도 마땅하지 않았고, 사 먹을 돈도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을 챙겨 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말 무슨 생각으로 거기까지 갔나 싶다) 뛰는 내내 배가 너무 고팠다. 게다가 달리는 도중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내가 돈을 내고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후회가 되었다.
달리기를 끝낸 후 친구들에게 들으니, 앞서 뛰던 친구들도 너무 배가 고파서 길에서 옥수수를 팔고 계시던 할머니에게 부탁(혹은 구걸)해서 하나씩 얻어 먹었다고 했다. 한창 먹고 있는데 뒤에서 내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나눠 먹기 아까워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녀석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마라톤을 함께 뛰었던 주 멤버 4명이 모든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나마 원래 친했던 두 명과는 마라톤이 아니더라도 연락도 자주 하고 가끔씩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춘천에서 함께 뛰었던 친구는 학교도 다르고, 친했던 친구들 무리도 달라서 평소에는 연락할 일도, 만날 일도 전혀 없었다. 그저 총무 역할을 했던 내가 마라톤 대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연락을 해서 함께 뛰고는 또다시 각자의 길을 가는 아주 독특한 관계가 이어졌다.
그렇게 1996년부터 1999년까지는 주 멤버 4명이서 일 년에 2~3개의 대회에 나가 함께 뛰었다. 하지만 고3이 된 2000년부터는 입시 때문에 더 이상 마라톤을 함께 뛸 수 없었다. 그래서 고3이 되기 하루 전 날 서울에서 열린 2000년 3.1절 기념 마라톤 대회가 우리들이, MRS 주 멤버들이 함께 뛴 마지막 마라톤이 되었다.
당시에는 내가 더 이상 마라톤을 뛰지 않을지 몰랐고, 더 이상 복근이 대단했던 그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될지는 더더욱 몰랐다.
별로 즐거울 일이 없었던 고3을 지나고 우리는 모두 다른 대학으로 진학을 하였다. 건너 들으니 복근이 대단했던 친구는 계획했던 대로 체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도 나머지 친구들끼리는 군대에 가기 전까지 자주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했지만 한 두 명씩 입대를 하기 시작하면서 예전만큼 연락할 일도 줄어들었다. 게다가 나의 모난 성격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친했던 나머지 친구들하고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연락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중 2008년 가을,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무렵 오랜만에 나머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만나면 항상 하는 이야기들, 중학교 때 있었던 이야기,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이야기, 군대 가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였다. 지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라톤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기 마련인데 갑자기 친구들이 함께 뛰었던 다른 친구의 소식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 복근 친구와 마라톤을 제외하면 연결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들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그가 벌써 3~4년 전에 군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을 해주었다. 왜 그랬는지는 그 친구들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가슴이 아팠지만 이제는 그 친구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너무 슬프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먼저 떠나야 했을까. 군대에서 험한 꼴을 당해봤던 나는 군대에서만큼은 죽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을 뛰어넘어야만 했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친구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어도 나와 그의 삶이 워낙 달랐기 때문에 2000년 3월 1일 이후 우리가 서로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오직 둘만 알고 있었던 일을 기억할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생각에 슬펐다.
현수막이 때리는 애드벌룬 밑에서 경기장에 들어오는 나를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차에 늦을 것 같은데 절대 뛰지 않던 나를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상을 등지기 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설마 뼈 있는 닭갈비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