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살다 보니 한국의 교과서나 영어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여기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들을 몇 개 알게 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이스하키에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잠보니(Zamboni).
이것은 아이스 링크의 표면을 관리해 주는 기계이다. 예전에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 중계를 보았다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수들이 절반 정도 연기를 마치면 이 기계가 투입되어 얼음 표면을 다듬게 된다. 당시 해설하시는 분들이 김연아 선수가 잠보니가 투입된 이후 얼음 상태가 좋을 때 연기를 하면 좋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제록스(Xerox)나 구글(Google)과 같이 회사 이름이지만 일반 단어처럼 쓰이는 단어이다.
그다음은 하키(Hockey)와 골리(Goalie).
우리는 아이스하키라고 부르는 것을 여기서는 하키라고 말하며 우리가 하키라고 말하는 것을 여기서는 필드하키(Field Hockey)라고 말한다. 그리고 골리는 아이스하키에서 넷(골대)을 지키는 사람으로 우리가 흔히 골키퍼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이스하키 골리를 비롯하여 무엇인가의 골을 막는 사람들을 골키퍼라고 주로 말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축구 골키퍼를 비롯하여 무엇인가의 골을 막는 사람들을 골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 Goalie는 Goaltender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무튼 이번 글은 거의 일 년 전인 2020년 2월에 썼던 글로 두 명의 40대 골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은 하키 경기가 펼쳐지는 것 자체가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이라 모든 것이 정상이었을 때의 일이다.
MLB에서 말하는 26인 로스터와 같은 것이 NHL(북미 하키 리그)에도 존재하는데, NHL에는 23인 로스터가 있고 한 경기에 20명까지만 출전할 수 있다. 이때 보통 18명이 스케이터(Skater, 주로 12명의 공격수와 6명의 수비수로 구성)이고 2명이 골리이다. 그런데 2010년대 말부터 NHL은 홈팀이 한 팀의 골리가 모두 부상으로 빠지게 되는 비상 상황을 고려하여 비상 대기 골리(Emergency Backup Goalie)를 준비하도록 규정하였다.
홈팀이나 원정팀에 상관없이 한 팀의 골리 2명이 모두 부상으로 빠지게 되면 비상으로 대기하고 있던 골리가 그 팀의 넷을 지키게 된다. 축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 규정은 참 특이하다. 축구에서는 골키퍼를 모두 소진하면 어쨌든 같은 팀의 필드 플레이어가 메꾸는데 말이다.
사실 한 경기에서 골리 2명이 모두 다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심지어 같은 팀의 후보 골리가 등장하는 일도 많지 않기 때문에(백업 골리는 주전 골리의 1/3 정도 출천 한다고 함)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데이비드 에어를 포함하여 이제까지 총 3명의 비상 대기 골리만이 NHL에서 뛰었다고 한다.
한편 지난 (2020년) 2월 23일 토론토 메이플립스와 캐롤라이나 허리케인스와의 경기에서 원정팀인 캐롤라이나 허리케인스의 주전 골리가 부상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의 비상 대기 골리였던 42살의 데이비드 에어는 자신의 대기 구역에서 경기를 지켜보다가 장비를 챙겨서 올라 오라는 첫 번째 연락을 받게 된다(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주전 골리가 다쳐서 백업으로 준비하게 된 것이 총 4차례라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2 피리어드를 8:41 남겨 둔 상태에서 허리케인스의 두 번째 골리마저 부상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디어 룸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번째 전화를 받게 되었고 드디어 42세의 나이로 꿈에 그리던 NHL 무대에 서게 된다.
미국과 캐나다 언론에서는 그의 데뷔를 '잠보니 운전사가 NHL에 데뷔'했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정확한 직업은 Mattamy Athletic Centre라는 곳의 매니저라고 한다. 물론 필요한 경우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직접 잠보니 운전을 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단순히 '잠보니 운전사'라고 그를 소개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많은 캐나다 아저씨들이 그렇듯 그도 NHL을 꿈꾸며 하키를 한 사람이었다(그런 점에서 여기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호호 할아버지도 손주들을 얼쑤 앉고 뒤로 앞으로 스케이트를 신나게 타신다). 그리고 그는 당시에도 하위리그에서 코치나 백업 골리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실력이 되니까 비상 대기 골리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허리케인스가 3-1로 앞선 상황에서 경기에 투입된 그는 곧 2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어진 3 피리어드부터는 안정을 되찾았고 총 8번의 슛을 막아내어 허리케인스의 6-3 승리를 지켜낸다. 이를 통해 그는 비상 대기 골리로서는 처음으로 승리를 한 골리로 기록되었다.
그 이후 일주일 내내 캐나다 언론은 물론이고 미국 언론에서도 그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유명한 TV쇼에도 출연하였고(나는 미국 방송을 잘 몰라서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여러 아침 방송에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용했던 하키 스틱은 NHL 명예의 전당에도 들어갔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저지에 하키 카드도 등장했다. 심지어는 허리케인스 팀이 위치한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그에게 명예 시민증까지 선사하였다. 신데렐라와도 같은 그의 이야기에 모두들 즐거워했다(정말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이야기인데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참고로 비상 대기 골리는 경기에 나가지 않고 대기만 하면 500불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놀랍게도 경기에 나가도 500불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경기에 나간다면 이번 경우와 같이 단순히 500불을 받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겠지만.
조 아저씨는 우리 옆집 아저씨이다. 그 집 아들이 하키를 열심히 하는데 장비를 보니 골리를 하는 것 같았다. 하키를 잘 모르는 내 입장에서 골리가 얼마나 인기 있는 포지션인지는 모르겠지만,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려서 친구들이랑 축구를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모두들 골키퍼는 안 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조 아저씨도 골리였고 나이가 들어서도 간간히 골리로 하키 경기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조 아저씨의 아들도 골리를 선택했던 것일까?
아무튼 그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들의 하키팀 사람들을 초대하여 파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와 마주쳐도 은근히 할 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내 성격상 더 그렇다) 그저 볼 때마다 '안녕'하고 인사를 할 뿐이었다. 그래도 여름이면 마당에 나가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겨울에는 밖에 나가 있을 일도 별로 없기 때문에 요즘에는(2020년 2월을 의미) 정말 가끔씩 눈이 마주치면 인사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작년 여름에는 그 집 냉장고를 옮기는데 큰 힘을 보태주었기 때문에 이웃으로 체면치레는 하였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 밤(물론 지난 2020년 2월을 의미) 갑자기 창밖으로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이 조용한 동네에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니 엠뷸런스가 세 대나 와 있는 것이었다. 조 아저씨네 집 때문에 온 것 같았는데 뭔가 바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가서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봐야 되나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앰뷸런스도 너무 많이 와 있고 다른 이웃들도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조용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겠다 생각하고 간간히 창밖만 살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조 아저씨의 딸이 매우 슬퍼하면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고(이상한 것이 아프면 집에서 앰뷸런스를 타러 갔을 텐데 그 반대로 움직였다), 어느 순간 밖을 보니 경찰차가 네 대나 와 있었다. 경찰차는 한 동안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거의 3~4시간은 있다가 돌아간 것 같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싶었다. 경찰차까지 온 것을 보면 혹시 가정폭력이나 그런 것이 연관되어 있을까 싶었다.
그 날 저녁 이후 한동안 옆집 아주머니의 차도 보이지 않았고 애들도 보이지 않아서 분명 무슨 일이 있긴 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조 아저씨의 차는 주차장(Driveway)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엄청난 싸움이 있어서 가족들은 모두 집을 나가고 아저씨 혼자만 집에 남아있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주말이 다 지나도록 옆집에서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아저씨가 경찰서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이 일이 있은 후 일주일 정도 지나도록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혹시나 싶어서 조 아저씨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구글을 검색 화면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구글에 검색된 것은 아저씨의 부고였다.
그러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앰뷸런스와 경찰차가 왔었고, 그래서 그 집 딸이 너무나 슬퍼했고, 그래서 그 이후로 집이 너무나 조용했던 것이다. 나는 그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언제 보았더라. 분명 하루 전에는 인사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나는데 당일은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심지어 우리 와이프는 그날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애들을 데리고 들어오다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고 한다.
부고를 보니 아저씨의 나이는 43세였다.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또래의 자식이 있는 입장에서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40대의 골리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42세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을 보내고 있고 한 명은 43세에 세상을 떠났다.
슬프지만 이것이 인생인가 보다.
이 글을 처음 쓰고 난 이후 채 일 년이 되지 않았지만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조 아저씨는 팬데믹으로 세상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저씨가 떠난 이후 동네에서는 아저씨의 사인에 대해서 조그마한 소문이 돌았다. 무엇이 사실이든 내 마음이 쓸쓸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일 이후 동네 사람들도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팬데믹을 거치며 조 아저씨는 많이 잊힌 듯하다. 그리고 혹시 이사를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옆집은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 놀랍게도 새로운 아저씨와 함께.
놀랍지만 이것이 인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