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주의 첫날 아침. 눈을 뜨니 웬 골방이다. 순간 여기가 어디지 싶다가 금세 정신과 신체가 현실로 돌아온다.
'아 맞다. 공부방에서 잤지!'
공부방을 오픈하기 전 신규 원장들은 '입문교육'이 필수인데 그 일정이 예상보다 빨리 잡혔다. 앞으로 거주할 제주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이 한달살이 이용 중인 상태라 계약한 입주일을 더 당길 수 없었고, 그나마 다행으로 공부방 임차 물건이 별로 없어 계약을 서둘렀던 터라 공부방이 공월세를 내고 있는 상태였다. 진짜 집으로 입주하기까지 삼사일 정도만 머물 곳이 필요해 아직 비어있는 공부방으로 네 식구가 덜컥 머물게 된 것이다.
예상과는 다소 다른 제주 이주의 첫날 아침에 어벙벙한 정신과 바닥에 얇은 요만 깔고 자서 찌뿌둥한 신체를 이끌고 방을 나온다. 15평 남짓의 투룸 오피스텔에 거실이 온통 붉게 물들어있다. 반사적으로 고갤 들어보니 일출의 작품이었다. 전면이 전체 창으로 되어 있어 다홍빛 햇살이 넓지 않은 거실을 금세 칠하고 있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나침반을 켜보니 동쪽이 맞다.
'아, 여기가 동향이었구나~!'
살게 될 공간이 아니어서 창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고 계약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한다. 이글이글 붉은 홍시 태양이 콕 찔러 터뜨리고 싶게 영 신경이 쓰인다. 시계를 한번 보니
'읭? 8시??'
일출의 아우라가 깊은 새벽을 방금 갓 뚫고 나온 기세인데, 벌써 대낮이 다 된 시간이라니. 늦잠꾸러기 일출이 어쩐지 인간적으로 다가와 웃음이 피식 나온다. 이주 첫날 일출도 보고 왠지 시작이 좋은 느낌이다!
잠든 아이들이 하나 둘 깨어난다. 아이들은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시간도 없이 눈을 뜨자마자 장난감 인형 버튼이 켜지듯 아무것도 없는 휑한 빈 집을 가지고도 잘도 재미지게 논다. 그 사이 나는 아침을 차리기 위해 간단히 옆에 있는 파리바게트로 내려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온다. 식탁도 없어 바닥에 꺼내려다 눈에 캐리어가 들어온다. 캐리어 위에 방금 사 온 종이백을 펼쳐 깔자 나름 훌륭한 조식 차림이 된다.
시작하는 이의 기분은 넝마도 비단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창 밖에는 키 큰 야자나무들이 일부러 내 눈높이에 맞춰 팔 벌려 잎을 흔든다.
일출쇼에 야자나무 퍼레이드까지.. 제주가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해~ :)
오피스텔 옆 대형마트로 당장 먹을 식자재를 보충하러 나간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사고가 터진다. 입구에서 카트를 하나 꺼내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사이 카트에 타 있던 첫째 아이가 떨어졌다. 손으로 막을 새도 없이 얼굴로 떨어져 눈에 충격을 입었다. 놀란 마음에 장보기는 무슨, 바로 병원을 알아보았지만 일요일이라 모두 휴무였다. 급한 대로 약국에 가 약을 사서 바르고 집으로 돌아가 놀란 아이를 다독인다..
시간이 갈수록 더 퍼렇게 부어오르는 멍에 눈탱이가 밤탱이만 해졌다. 눈 안이 다친 것 같진 않아 다행이지만, 혹시나 머리로 충격이 가해지진 않았을까 병원 진단 전까지 걱정이 가득하다.
조금 진정을 취하고, 남편은 승용차를 가지러 나갔다. 한 달 전 제주에서 대구로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차를 원래 우리가 지낼 집에 세워두었는데, 계획과 다르게 공부방에서 먼저 며칠 지내게 되어 차가 없는 상태였다. 공부방과 집은 차로 30분 거리여서 남편은 비용이 적지 않은 택시비 대신 1시간짜리 버스를 택했다. 그럼 갔다 오는데 1시간 반이 걸리니 저녁 시간에 맞춰 돌아오겠다는 멋진 계획이었다.
허나 안 좋은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고 했던가. 한 달간 차를 그냥 세워두어서 인지 차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긴급출동 서비스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니 먼저 저녁을 먹으라 한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먼저 챙겨주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역국을 배달시켰는데, 아뿔싸! 밀키트다;; 아직 짐이 안 와서 냄비도 하나 없었다.
'망햇...;;;;;'
잠시 사고회로가 일시정지했다가, 배고프다는 아이의 말에 재부팅된다. '또 배달을 시키느냐 마냐'를 고민하다 그냥 아래 편의점으로 향한다. 울며 겨자 먹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때마침 긴급 출동 서비스를 받고 집으로 출발했다는 남편의 전화에 오늘 저녁 메뉴는 라면임을 이실직고하자
"허허허.. 제주 이 녀석 환영식이 거하네~ 외지인 입도한다고 제주 텃세를 격하게 부려."
남편도 웃는다.
입도한 첫날 하루동안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들에 얼떨떨한 나약한 인간은 괜스레 제주 탓을 해본다. 아침엔 제주가 분명 날 환영해 준다 혼자 신이 났다가, 오후엔 이 놈이 나에게 텃세를 부린다고 짜증을 부린다.
말이 없는 제주는 잦은 변덕들을 조용히 들어준다.
'내일부턴 공부방 준비로 할 일들이 많은데, 잘 부탁해 제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