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통 창 가득 쏟아지는 햇빛과 수도 종류도 다양한 새들의 시끄럽도록 지저귀는 소리.
온 세상이 알람이 되어주는 자연 속 아침에 눈을 뜬다.
"으으으... 춰~"
이불속에서 몸을 일으키자 한기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어젯밤 한겨울에 고장 난 보일러에 우리 가족은 무슨 객기로 다 같이 거실 바닥에서 부둥켜 온기를 나누며 자기를 택했다. 실상은 온기는커녕 바닥의 냉기가 고스란히 느껴져 오히려 침대보다 더 추웠다. 이 와중에 이불을 다 걷어차고 이리저리 헝클어져 자고 있는 아이들.
어제는 늦은 시간이라 주인께 문의도 못 드렸지만, 아침의 한기는 나에게 곧장 핸드폰을 집어 들게 만든다.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에 연락드려 죄송해요~ 어젯밤부터 보일러에 에러 문구가 뜨면서 보일러가 돌아가질 않아서요~..."
고장의 원인은 기름 부족!
주인분은 기름 양 확인하는 법을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기름집에 연락하면 되는데, 하필 일요일이라 문 연 곳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급한 대로 한 통이라도 구해다 주겠다며 아이들과 춥게 잤겠다고 매우 미안해하셨다.
몇 시간 뒤 급하게 기름을 가져온 집 주인분은 보통 함께 오던 아들이 아닌 오늘은 19살 딸과 방문했다. 딸은 이번이 초면인데, 그을린 피부의 엄마, 오빠와 달리 제주의 햇빛이 모두 피해 간 듯 하얀 피부에 무신경히 잘린 커트머리를 감지도 못하고 급하게 온듯해 보였다. 큰 눈에 투명한 피부의 소녀소녀한 외모와 달리 보이쉬한 낮은 저음으로 짧게 인사한다.
주인분은 기름을 금방 통에 채우고, 직접 만드셨다는 빵을 좀 가져왔다며 내미신다. 곡물이 콕콕 박혀 굽기보단 찐듯한 러프한 빵이 신기해 보였다.
"어머~! 빵도 만드세요? 들어오셔서 커피랑 같이 드시고 가세요~ "
라고 내가 제안하자 남편도
"저희 때문에 아침부터 성산에서 먼 길 오셨는데, 이야기도 좀 나누고 가세요~"
라며 거든다. 그러자 그녀는 흔쾌히
"그럼~ 그럴까요~?"
라며 받아준다.
내가 드립커피를 내리는 동안 어른들은 식탁에 앉아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거실창으로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들과 잘 놀아주던 오빠와 달리 숫기 없이 엄마 옆에 찰싹 앉아있던 주인딸은 나직이
"피아노 고장 난 덴 없겠지.?"
라며 옆 방에 놓인 피아노를 언급한다.
이 집은 주인집 자녀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10년간 살았던 집으로 피아노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들였다가 이사 갈 때 예전엔 없었던 앞 채(현재 도자기 공방으로 쓰는)가 생기면서 작아진 대문을 차가 진입하지 못해 피아노를 가져갈 수 없었다고 한다.
"저 피아노는 이제 이 집이 없어질 때까지 여기 있어야 돼.ㅎㅎㅎ"
라고 웃으시며 두고 간 피아노를 아련해하는 딸을 눈치채시곤
"네가 한번 쳐 줄래? 커피 맛도 더 좋게~"
라며 부탁하는 체하신다.
표정 변화가 많이 없던 주인딸이 반색을 감추지 못하고
"아, 그럴까?"
라며 낯선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부끄러움보다 오랜만의 피아노를 만질 수 있는 반가움이 훨씬 커 보였다.
막 커피를 다 내려 테이블로 가져간다.
주인집 딸은 벽 하나만 사이에 둔 바로 옆 방에서 먼지 낀 피아노 뚜껑을 열어 아주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안부를 나누듯 손가락을 푼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한 첫 곡은
'히사이시 조의 Summer' 였다.
오랜만의 연주가 어색한지 시작 부분에 몇 번 버벅거리더니 금세 음들이 신이 나 미끄러져 날아다닌다.
아는 노래가 나와 반갑다며 웃으며 듣던 남편과 나는 점점 말수가 없어졌다.
일요일 아침 떡진 머리에 잠옷 바람.
방금 내린 드립커피의 싱싱한 진한 향.
집에서 만든 거의 무맛에 살짝 곡물향이 나는 빵.
그리고 Summer.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그 순간을
너무 비싸게 만들었다.
준비운동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고급스러움의 파도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냥 여느 주말 아침에
숲 속에 둘러싸여
잠옷바람으로 맞는
완벽한 향연.!
내가 이러려고 제주 온 게 맞긴 한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상상보다 더한 현실에 조금 어지러웠다.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이성에게 아침에 일어나 씻지도 않고 갑자기 입맞춤을 받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마당에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놀던 아이들도 피아노 소리에 귀를 쫑긋이며 방으로 쪼르르 달려온다. 그리고 처음 보는 누나의 피아노 연주가 아이들에게도 놀라웠는지 바로 옆에 다다다닥 붙어 눈을 잔뜩 반짝이며 서로 자기도 피아노를 치겠다며 난리다.
아이들의 갑작스러운 협연 공세에 공연은 급 마무리가 된다. 그냥 가구인줄로만 알았던 피아노에서 저런 소리도 날 수 있다는 충격에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은 한참 띵뚱땅똥~! 자기들끼리 피아노를 두들겨대더니 생각하는 음이 나오지 않자 금세 흥미를 잃고 거실로 우다닥 나온다.
첫째 율이가 자기가 가장 아끼는 인형이라며 너덜너덜한 강아지 인형 '코코'를 집주인 이모에게 소개한다. 그 인형은 우리 집안에 찾아온 첫 아기인 율이가 너무 반가워 친정엄마가 갓난쟁이에게 사준 '첫 아이'의 '첫 인형'이었다. 그걸 7년째 아끼다 보니 인형이 다 헤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속상하다고 하자 주인분은
"어머~ 율이가 정말 속상하겠구나. 이모가 고쳐줄까?"
라고 기대치 못한 말을 한다. 율이는 깜짝 놀라
"진짜요??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럼~~ 이모가 마법 좀 부려줄게~"
라며 환히 웃으신다.
이 집의 주인인 50대 초반의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손으로 하는 일은 거의 다 할 수 있는' 엄청난 황금손이다.
도자기, 조경, 요리, 제빵, 재봉, 그림, 목공, 건축, 전기 등.. 못하는 게 거의 없다.
그녀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타샤튜더' 같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교육관도 아주 존경스럽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이 집을 지은 건축가 남편과 성격차로 갈라서, 그 당시 이혼이 흔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에서 홀로 두 자녀를 키웠다.
부모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지지하는 사람'이라며 절대 공부든 뭐든 강요하지 않고, 하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열렬히 지지하되, 포기하고 싶어 할 땐 언제든 뒤에서 안아주는 든든한 내 편이 되주었다.
그래서 그녀의 딸이 저렇게 전공도 아닌 피아노에 흠뻑 빠져 연주하는 모습이 새삼 놀랍지 않다. 아들은 바이올린을 잘 켠다고 하는데 다음에 꼭 들어보고 싶다.
제주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내게
그녀는 제주에서 내려준 귀인이다.
도시에서 대기업을 다니며 30평대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며
남들처럼 사는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안정' 대신
'자유'라는 지도 없는 길이
사실.. 불안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런 우리에게 그녀는 미리 보는 '정답지' 같았다.
것을 보여준 멋진 사람이었다.
나도 나이가 든다면 저렇게 되고 싶다.
.
그리고 며칠 뒤 그녀는 아주 보들보들하고 말끔한 배로 새롭게 태어난 코코 인형을 데리고 와 주었다.
자신 있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상상해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라면,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