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공식

안나카레니나 법칙

by 킴 소여

아침에 눈을 뜨자 맞은편 벽에 좁고 기다란 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우거진 나무들이 부드럽게 몸을 흔들며 깨어나고 있는 참이다. 막 나무를 깨우고 온 아침 햇볕은 나와 눈이 마주치곤 빙그레 웃으며 창을 통해 방으로 들어온다. 창을 통과한 빛은 부서져 산란한다. 그리곤 처언천히 꽃잎처럼 춤을 추며 빛 부스러기가 되어 가슴으로 내린다. 스며든다. 몸이 스윽 일으켜진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꿈꾸던 자연 속에서의 삶.


일어나 방을 둘러보니 둘째는 거실서 창밖을 보며 다시 돌아온 이 집이 좋은지 헤헤거리고 있고, 첫째는 다른 방에서 아직 자고 있다. 그리고 남편이 보이질 않는다.

'아! 남편은 스테이 준비하러 대구 갔지?'

오늘 대구집 첫 스테이 손님 입실 준비를 하러 남편은 어제 올라갔다. 오늘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기로 했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공항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공항에 도착해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란다. 그런데 잠 한 숨 못 자고 일을 해 돌아가는 길에 졸음운전을 할까 걱정이란다. 1시간 산길을 운전해 와야 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푹신한 침대에서 잘 자고 일어난 내가 괜히 미안해진다..


1시간 뒤 남편이 돌아왔다. 아니 좀비가 왔다! 생각한 것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그는 배터리 1% 남은 꺼지기 직전인 모습으로 퀭하게 들어왔다. 그 깔끔쟁이 남편이 머리도 안 감고 오고 안쓰러워 손을 잡으니 까칠한 촉감에 놀라 손을 본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뭐지.. 하루 만에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나?

"자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ㅠㅠ"

남편은 일단 너무 자고 싶다고.. 곧장 샤워부터 하러 들어갔다.

오늘 손님이 입실하는 날이어서 남편은 세팅을 마치고 차마 샤워를 다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씻고 나면 또 욕실 청소를 해야 하니까..


씻고 나온 그는 조금 개운해져 배터리가 5%로 살짝 올라간 듯하다. 바로 침대로 가지 않고 마당으로 나가 털썩 의자에 앉는다. 아니 거의 묻는다. 그제야 집에 돌아옴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는 침대로 돌아가 그만 꺼져버렸다. 충전 모드로.

의자 뒤에 파묻힌 그




돌아온 아빠와 감동적인 재회도 잠시 아이들의 관심은 온통 놀 생각에 마당으로 간다. 춥지도 않은지 얇은 잠옷 차림으로 마당을 뛰어다닌다. 조금 놀다 들어오겠지 싶어 내버려 두었더니 웬걸 박스에서 장난감들을 찾아 꺼내 아주 본격적으로 놀 태세를 갖춘다. '아.. 저 모습은 최소 두 시간 각이다.' 싶어 외투를 꺼내와 위아래로 단단히 입히고 마스크까지 씌운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나는 주방에서 아침밥 준비를 한다.

좀 놀 줄 아는 아이들

아이들이 시끄러워 오래 잠들기 힘들었는지 남편은 두어 시간 만에 방에서 나온다. 아침에 끓여 놓은 된장찌개를 데운다. 집밥으로 그를 다시 채우길 바라는 마음에 더 정갈히 상을 차려본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청소라는 게 해도 해도 딱 종결점이 없다는 것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손은 근데 왜 그렇게 다쳤냐고 묻자 언제 다친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사실 말을 하지 않아도 보였다. 그와 한 회사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모두 안다. 그가 얼마나 완벽주의인지. 결과가 완벽하지 않으면 자신이 상할 때까지라도 결과를 완벽히 만든다. 그는 몸이 다치는 것보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성급한 숙박 사업 시작을 반대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시작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또한 나인걸. :)


결국 남편만 늘 고생하는 이 패턴은

사실상 우리 부부의 공식이었다.


그리고... 그 공식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 자기야.. 사실 미안한데^^; 오늘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

내가 멋쩍게 말을 꺼내고 밥을 씹고 있던 그가 아직 대답도 하기 전에 얼른 말을 잇는다.


"막 큰 일은 아니고~ 그 공부방에 필요한 선반 알아보다가, 아니 막 인터넷에는 너무 별로거나 너무 비싼 것 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발품을 좀 팔다가 딱!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는데! 마침 디피 상품을 할인하더라고~ 근데 그게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여서^^; 좀.. 빨리 가야 해 ^^ ㅎㅎㅎ....호호"

"ㅎ... 뭐지 난 이 집 머슴인가 ㅎㅎㅏ.."

남편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르겠는 숨을 섞어 뱉는다.




집에서 제주시 모던하우스로 가는데 한 시간. 그걸 또 차에 싣고 공부방에 내리러 가는데 한 시간.

장거리 운전이 미안해 내가 운전을 하겠다는데도 남편은 한사코 운전대를 넘겨주지 않는다.

"난 운전하는 거 좋아해."

진짠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곤, 나는 이기지 못하는 척 조수석에 앉는다.


그렇게 성인 혼자선 들 수 없는 가구를 둘이서 낑낑 들고 공부방에 도착하는데.!?


산 넘어 산.

현관문 앞에 높은 산이 있었다.


수부욱히 쌓인

택배 산.

오늘 막 대구에서 수북이 쌓여있던 택배 산을 넘고 온 그는 제주에서 2차 택배 산을 연달아 만난 것이다.

태백산맥 뺨치는 택배산맥.
좌 대구 / 우 제주 택배산맥


이제 겨우 기운을 조금 충전한 그에게 또 산더미 같은 일거리를 준 것 같아 미안한 나는

"아 초도물품들이 왔다고 하던데.. 이렇게 많았구나ㅎㅎㅎ 절대 급한 거 아니라 오늘 안 해도 돼~ 아직 오픈하려면 멀었는데~ 천천히 하자~~~ㅎㅎㅎㅎ;;;;;;"

당황한 내 변명에 그도 오늘은 주말이라 아이들이 같이 있으면 일이 두배로 힘들다고, 조용한 평일에 하자며 오늘은 집 안에 넣어 두기만 한다.


그렇게 새로 들인 가구가 공간에 쏙 맞아 들어간 것을 보니 기분이 좋다. 그러고 피곤한 남편이 걱정돼 곧장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저녁거리를 고민하다 아이들이 치킨이 먹고 싶다는 말에 동네에 평이 좋은 오래된 닭집에 주문한다. '중앙닭집'이라는 개성 없는 이름과 달리 저렴한 가격에 양이 아주 많다. 분명 반반치킨을 시켰는데, 두 마리 치킨을 잘못 주셨나 싶을 정도였다. 맛 또한 놀라울 정도로 기본에 충실한 훌륭한 맛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양과 질이 모두 뛰어난 고수의 치킨을 이런 시골에서 만나다니. 어디서든 환경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장인들이 있어 새삼 존경심이 든다.


이렇게 신성한 치킨타임을 가지는 와중에.. 어쩐지 집이 좀 싸하다. 으스스한 한기에 보일러를 더 높이러 가는데 메시지가 깜빡인다.

'ERROR' !?

맙소사 1월에 보일러가 안되다니!


밤늦은 시간이라 집주인께 연락하기도 송구해 일단 꾹 견뎌보고 아침에 전화키로 한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서로를 꼭 부둥켜안고 잠자리에 든 우리 네 식구. 침대에서 4명이 잘 수 없어 굳이 침대를 두고 바닥에 이불을 펴 다 같이 눕는다.

이러면 좀 더 따듯할 거라며..


왜 이럴 때 안나카레니나 법칙이 생각날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우리 가정에겐 우리 부부의 공식이 있다.

일단 가라. 남편이 다 해결해 줄 것이다.


언제나 든든한 남편과 보일러가 나가도 그저 좋은 해맑은 아이들만 있다면 어떤 불행이 와도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꾸 파고드는 아이들의 살결 속에 스르륵 잠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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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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