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좋아서 온 제주.
허나 여행과 다른 생활 속 제주는
자연이기 이전에 인간이길 요한다.
지난번 첫 입회 상담을 한 후 일주일이 되도록 그 학부모는커녕 다른 문의 전화도 한 통 없다. 교육업계는 1년 중 신학기인 3월이 가장 성수기라는 지사장의 말에 한 달 전인 2월 오픈을 계획하였건만. 오픈한 지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으니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려 애써 노력한다. 아직 3월도 되지 않았고..
그러는 와중에 부지런히 홍보를 이어나간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인스타 계정을 만들어 요즘 대세라는 릴스도 만들어보고, 인근 초등학교, 유치원 신입생 OT 일자를 조사해 날에 맞춰 홍보 물품 포장하고, 나눠주는 일로 일주일 스케줄표를 가득 채운다.
공부방 내부 시설은 큰 것들은 얼추 다 갖추었지만 더 있으면 좋은 것들은 없는지 계속 알아보던 중,
"당근!"
당근에 키워드 알림을 걸어둔 '교구 드림' 메시지에 딱 찾던 물건을 발견한다. 장소도 집에서 10분 거리. 서둘러 메시지를 보내고, 내일 아침 거래가 가능하다고 해 바로 일정을 잡는다.
다음날 아침.
"룰룰루 룰루 룰루 룰루룰루 룰루~~~
시원한 바람을 타고서 driving to you~ "
어반자카파의 「Driving to you」를 차 스피커로 잔뜩 틀어놓고선 따라 흥얼거린다.
'공짜'는 학생 0명인 원장도 콧노래가 나오게 한다.
남원 중산간 도로를 가로질러 비슷한 고도의 성산 방향으로 가는 숲길은 숲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착각이 든다. 가도 가도 끝없이 계속되는 숲의 행진. 중간중간 나무와 나무 사이 빈틈으로 터져 나오는 햇빛과 연녹빛깔 여린 초봄의 새싹들. 눈동자 가득 초록을 쉼 없이 채워 담아 넘쳐흐르고 아직 아침잠이 덜 깬 듯 꿈같이 몽롱한 초록빛 터널을 달려가고 있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차를 주차하고 당근 메시지를 보내자 금방 계단을 우다닥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한 여성 분이 집에 있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손에 묵직이 교구를 넣은 종이가방을 들고 나오신다. '아이들이 너무 잘 쓰고 여한 없이 드림한다'며 선량이 웃으시는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따뜻해진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숲길을 지나 큰 대로로 진입하려고 우회전 깜빡이를 넣고 기다리던 중, 무심코 정면 직진 방향 끝에 펼쳐진 높고 푸르른 해수면이 범상치 않은 포스로 눈을 사로잡는다. 순간 '꼭 봐야겠다'는 강한 충동이 들어 깜빡이를 끄고 직진 신호가 바뀌자 망설임 없이 돌진한다.
바다는 제주도에 흔하다. 어딜 가도 바다가 있다. 하지만 이 좁은 섬 하나를 둘러싼 바다들은 참 요상하게도 조금만 지나도 모두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첫눈에 그냥 뭔가 가슴을 탁 치는 위압감은 운전대를 돌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따라 바람도 거셌다. 정확히는 거기만 거셌다. 파도는 성나 있었고, 쉴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파도에 하이얀 해일만 드높이 부서지고 있었다.
직진한 차를 적당히 '차량 진입 금지' 표지판을 지나지 않게 떨어져 세운다. 인간에게 신적인 자연의 영역에 침범을 경고하듯 붉은 표지판은 감히 거스를 생각을 할 수 없게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 나있던 도로는 이미 파도에 잠겨 끝이 보이지 않는다. 바다는 그 정도로 성에 차지 않는지 멀찍이 서있는 나조차 차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어 보였다. 무서운 기세로 서슬 퍼렇게 달려드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가슴에 얹게 된다. 그런데도 물러서지도 눈을 뗄 수 없는 신적인 힘에 압도당해 한참을 멍하니 제자리서 바라본다.
수 없이 하얀 해일을 연달아 일으키며 몰려오는 파도들은 언뜻 보면 모두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매번 다르게 유혹적인 몸짓이다. 바다의 신이 보낸 전령들과도 같은 파도에 두려움과 숭고함에 몸을 떨며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앗, 근데 여긴 어디지?'
문득 든 현실 감각에 지도를 켜보니
'성산 신천목장' 앞바다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바다의 여운이 한동안 가시지 않는다. 그냥 바다. 사진으로 담을 수도 말로 전할 수도 없는 내 가슴에 혼자 담을 그냥 여느 바다였다.
그때 전화기가 울린다. 이웃 교육원 원장님의 전화다. '내 공부방이 생긴 걸 학부모들께 안내했더니 한 학생이 집이 공부방 바로 앞이라며 교육원 이전을 희망한다'는 말을 전한다. 나는 첫 학생이 생기는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학부모들께 안내해 준 원장님께 너무 감사함을 표하며, 오늘만 감사한 일이 두 번째다.
전화가 끝나고 남편에게 바로 첫 입회 소식을 전하는데 문자가 한 통 온다. 지난주 첫 상담한 학부모의 연락이다! 3월부터 등록하겠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오픈 한 달째 학생수 0명이던 내 공부방은 하루 만에 제로를 탈피하고 회원수 2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정말 3월이 임박해 오자 이제껏 잠잠했던 문의전화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연의 숭고함.
인간사의 먹고사는 작은 일들.
그 둘은 아주 멀은 듯 보였다.
나는 그것이 반대라고 생각해 원래 있던 곳을 떠났다.
그래서 정답이라 생각해 떠나온 자연에서
뜻밖에 다시 원래 있던 곳과 비슷한 '인간의 한계'를 발견한다.
돈, 책임, 사회적 모습, 인간관계...
내 환상이었나 싶어 좌절 속에 빠져 있던 때
오늘 아침 바다의 강렬한 만남은 알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각을 던져 넣는다.
[자연도 인간도 답이 아니라고.
어느 하나의 이중 택일적 편중된 선택이 아니라
자연의 끝에 인간이 있고, 인간의 처음에 자연이 있어
둘은 멀지만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고.
둘을 화해시키고 조화를 찾아야 한다고.]
바다신의 전령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섭게 혼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