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귀뚜라미가 됐다

by 킴 소여

새로 옮긴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은 잘 적응해 주었다. 지난번 도난 사건이 있었던 어린이집이 집 근처였다면, 새 어린이집은 공부방 근처다. 공부방과 집은 30분 거리여서 아이들 등원 시간도 편도로 30분, 왕복 1시간이 된다. 그나마 아이들 등원시키는 김에 공부방으로 출근을 하면 되긴 하지만, 등원은 9시인 반면 공부방은 2시에 시작한다. 사실상 다섯 시간이나 일찍 출근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또한 제주에 대한 열정으로 무리한 등원 거리는 문제 되지 않는다 생각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제주잖아. 주 4일 근무고, 공부방도 스테이 사업도 금방 자리 잡고 있잖아.'

실제로 공부방은 오픈한 지 일 년이 되지 않아 학생이 서른 명에 육박했고, 스테이도 슈퍼호스트로 평점 만점을 유지하며 매달 예약이 안정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고생도 '올해까지만 하면 끝'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현재 집의 연세가 올해로 끝나면 내년엔 공부방 근처로 이사하면 되고, 그러면 집, 직장, 학교가 모두 근방이어서 모든 일상이 효율적으로 정상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딜 만했다. 공부방에서 더 멀리 위치한 표선의 IB 국제학교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 본 적 없는 습함과 더위가 만나 꾸덕한 마라탕 맛의 제주 여름. 제주에서 첫여름을 맞는 우리 가족은 처음 먹는 고수의 맛처럼 짜릿하고 잊지 못할 여름을 보냈다. 7, 8월 동안 매주 1회 이상 물놀이를 다니며, 제주 사방의 해수욕장과 물놀이장을 누볐다. 그 해 처음 산 아이의 수영복은 여름이 끝나기 전에 헤져서 생명을 다 할 정도였다.

그렇게 24년의 여름은 제주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숲과 바다 그리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 아이들 속에서 매일이 다채롭고 행복했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행복에 가려 공부방도 스테이도 육아도 모두 가능하게 서포트해 준 든든한 배경의 존재를 잊었다기보단 당연시 여기고 있었다.


공부방 학생 수가 늘면서 혼자 감당하기 힘든 학생들의 잔잔한 등하원 관리와 우리 아이들 등하원 및 저녁식사 준비 그리고 틈틈이 대구 스테이 유지관리로 대구를 오가며 분주히 뒤에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서포트해 준 남편. 묵묵히 내 주도 하에 이뤄진 생활 패턴을 맞춰 주던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편하게 생각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시간도 제주일 거라 확신했고, 내년의 삶을 아무 의심 없이 계획하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나만큼 자기 주도적인 성향의 남편이 자의에서라지만 학창 시절에도 이렇게 수동적으로 살아본 적 없었다. 아무리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가족들이 행복해도, 아무튼 자신이 만든 향이 아니었다. 제주 여름의 습한 공기 속. 남편의 마음은 보이지 않게 조금씩 부식되고 있었다.


여느 매일 아침처럼 함께 아이들 30분 등원을 시키느라 다 함께 차를 타고 가던 길에 조용히 운전을 하던 남편이 어젯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속에서도 자신이 나를 계속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챙기며 도와주다가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자 울컥 화가 나 "내가 니 '뒷바라지'하려고 태어났냐!!!!"며 소리를 크게 내질렀는데, 순간 시간이 렉 걸리듯 멈추면서 "뒷바라지뒷바라지뒷바라지뒷바라지..." 소리만 반복되더니 갑자기 뒷바라지뒷바라지귀뚜라미..'귀뚜라미'로 남편이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뭐~? 완전 개꿈이잖아?"라며 나는 웃었지만, 둘 다 조용히 이어지는 침묵으로 생각에 잠겼다. 원래 눈치가 없는 편인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꿈을 듣고도 '그냥.. 개꿈 맞지?'라는 생각이 사실 앞섰다. 그리고 남편은 그게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세상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아름다웠다. (지지난번 글 [20화. 여름정원의 금메달]만 봐도..) 그리고 제주에서의 다음 무대인 국제학교와 표선을 알아보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전히 한 낮은 35도에 육박하는 늦여름의 발악 속에서 전혀 느끼지 못한 새 손님의 방문은 밤이 되어서야 보였다. 영원할 것 같던 여름 속에서 어느덧 잠자리에 선풍기를 끄게 되고, 발로 밀어만 내던 이불을 새벽녘 손을 더듬으며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밤의 풀벌레 소리가 선선한 공기와 뒤섞여 더욱 청량해지는 계절 '가을'. 가을은 늘 그렇게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깊은 밤 창문 사이로 살며시 들어오는 손님이었다.


"이제 대구로 돌아가자."

그리고 가을과 함께 남편의 마음도 계절이 바뀐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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