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백수 남편과 학원에 꽂힌 아내

by 킴 소여
- 남편의 하루 -
9시. 집에서 가족 모두 출발. 아내 공부방과 아이들 어린이집으로 간다.
9시~10시. 아이들 등원 후 공부방에서 아내와 아침 식사 및 출근 준비를 한다.
11시. 공부방 오픈까지 3시간 정도 자유시간. 아내는 수업 준비를 하고, 나는 잠시 자유 시간. 도서관을 걷거나, 산책을 하며 생각을 하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생각은 좀처럼 깊어지지 않는다.
오후
2시. 공부방 인근 초등학교와 유치원 학생들 픽업을 도와준다.
5시. 우리 아이들 하원. 첫째는 공부방에 데려와 같이 수업시키고, 아직 수업을 거부하는 둘째는 근처 놀이터에 데려간다.
6시 반. 공부방이 끝나고, 가족 모두 태워 집으로 귀가.
7시. 저녁식사 준비 및 집안 살림.
10시. 잠.


[ INFJ 남편 시점 ]

모든 일에 완벽주의자인 나는 어디에서도 신망받는 사람이다. 집안에서도 든든한 장남이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간부였다. 그런 내가 모든 역할을 깨뜨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로 온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함이다.


40년 넘는 인생을 주변에 맞는 완벽한 역할 수행에 보냈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완벽한 역할 속 이미 나 자신은 너무 많이 사라졌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정작 나 자신과는 친해질 틈이 없었다. 어디서든 인정받지만, 정녕 나 자신은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즐기는 것도 없는 무색무취의 인간이 돼버린 거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나 자신을 찾아야 했다. 이대론 역할극에 숨이 막혀 자신이 사라지기 일보직전이다. 다행히 아내도 동기는 조금 다르지만 변화에 대한 생각이 같다. 우리는 모든 관계를 끊고, 단절과 새로움의 장소 제주로 향하기로 한다.


아무 계획 없이 온 제주였지만, 제주의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껴지는 해방감에 모든 게 보상될 것 같았다. 그동안 내 삶의 노고를. 3개월의 제주살이가 끝나고 이제 대구로 돌아가 새롭게 현실을 시작하려던 나와 다르게 아내는 계속 제주에서의 삶을 이어가고 싶단다. 나 또한 3개월은 아쉽기도 하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 일 년 정도 더 살아보아도 좋겠다고 생각해 동의한다.


그러나 제주살이와 제주이주의 생활은 많이 달랐다. 여행에서 현실로.


아내가 더 원해서 시작한 이주라 책임감을 느껴서인지, 실행파인 아내는 바로 공부방을 열어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아직 무언가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아 조금 더 제주에서 나 자신과 앞으로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 필요해 제주살이 때와 같이 자연 속에서 내 시간을 많이 갖길 기대했다.


그러나 집에서 거리가 멀어진 공부방과 아이들 어린이집 등 예상외로 내가 도와야 할 작고 잔잔한 일들이 많아지고, 의외로 덜컥 아내가 올린 스테이 일도 실질 업무는 결국 내가 나서게 된다. 나는 밖에서 보기엔 마누라가 돈 벌어다 주는 제주 백수로 많은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말 못 할 실상은 정작 하루 중 중간에 몇 시간씩 내 시간이 틈 날 뿐, 그 틈에 뭔갈 계획하거나 사색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의지로 못할게 무어냐고 할 수 있지만, 궁극적인 내 제주의 목표인 '삶의 주도권'은 예나 지금이나 없어졌다.


나완 다르게 주도적 삶을 하나하나 개척해 가는 아내는 제주에서의 삶이 매우 만족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일지라도.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역할을 하며 살기엔 '나 자신의 땅'이 없다. 내가 있어야, 다른 무엇도 될 수 있거늘. 난 제주 역시 답이 아님을 인정하고 아내에게 말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대구로 돌아가자."




[ INFP 내 시점 ]

'대구로 돌아가자'는 남편의 청천벽력같은 말이 떨어졌다. 사실 요즘 왜인지 모르게 남편이 다운되고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을 부쩍 느꼈다. 내 생각에 이게 다 아직 직업을 갖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제주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자기만 공중에 붕 뜬 것 같고, 가장으로서 주도권도 뺏긴 것 같은 불안감에 원래의 터전이었던 대구로 회귀본능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난 결코 제주를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직 제주라는 장소에서 기대한 '해방' 비슷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그방 돌아가는 건 예상 못한 시나리오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에게 제주에서의 안정감을 주자! 밤에 잠도 안 오고 이 생각에 몰입한 나는 여러 방법을 고민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취직'. 나는 몰래 제주에 남편 이력들과 맞는 구인공고를 찾는다. 육지와 다르게 대기업과 같은 양질의 일자리는 거의 없다. 그러다 하나를 발견했는데 마감기간이 임박했다. 되든 안되든 일단 남편에게 '제주에서도 된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남편 몰래 '남편 이력서'를 쓰기로 한다.


그런데 자소서의 예상 못한 항목에서 막힌다. 남자는 '입대 정보'를 적어야 하는 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입대 일자와 소속을 물어보다가 남편이 그걸 왜 묻냐고 되물었다. 결국 사실대로 괜찮은 자리가 있어서 서프라이즈로 이력서를 써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이 크게 화냈다. 나는 되든 안되든 가볍게 넣어본다는 것이 되돌아보니 남편에게는 자신을 무능하다 여기고 믿지 못한 것 같아 화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닫는다.


이번 일로 크게 반성을 했지만... 그렇다고 제주를 쉽게 포기할 순 없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깊이 고민하던 끝에.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이번엔 신중히 여러 정보들을 알아본 후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야~ 요즘 공부방도 잘 되고 입소문도 나고 있어서 문의가 많아. 그런데.. 공부방이다 보니까 차량 운영을 안 해서 못 오는 건도 많고, 나 혼자서 가르치려니 한계가 있어서 대기도 많아. 하.. 지금도 학생이 30명인데, 학원 확장에 차량까지 하면 진짜 잘 될 텐데~"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학원 할까?? 그럼 차량도 되고, 정식으로 학생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자기도 원하면 같이 수업해도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역사 수업 같은 것도 잘하겠다."

"뭐어~? 학원은 공부방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상가 임차며, 인테리어며 학원 차까지 비용이 몇 배나 들어가는데! 그리고 난 혹시나 차려도 개입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 비용! 그것이 내 전략이었다. 학원을 차리면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그럼 매몰비용이 늘어나 제주를 뜰 수 없을 것이라는 완벽한 계획. 거기다 제주에서 일자리 찾기도 어려운데, 직접 남편 일자리도 내돈내산으로 만들 수 있고! 음하하하! 완벽한 계획이지만, 남편에겐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까 내가 학원을 너무 하고 싶다고 졸랐다. 계속 남편 귓가에 학원 관련 정보를 흘려 넣었다. 인근 상가 물건이나 예상 인테리어 견적 등을 계산하며 계속 남편 귀에 '학원 학원' 노래를 불렀다.




[ 남편 시점 ]

내 아내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집념의 여자다. 마음먹은 건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죽도록 매달린다. 코로나 시절 둘째 출산 후 십 킬로 넘게 찐 살도 1년 동안 집에서 홈트로 독하게 뺄 때 알아봤지만, 저 여자는 이번에 '학원'에 제대로 꽂힌 것 같다. 마음먹은 건 될 때까지 할 텐데 요즘 나는 매일 학원 타령에 시달리고 있다.


저렇게나 하고 싶어 하고, 계산은 더 해봐야겠지만 수익성이 없을 것 같진 않은데.. 정 하고 싶으면 한번 알아보라고 해야겠다. 대신에, 나는 학원 일에 관여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그렇게 나의 새로운 집념의 타겟이 생겼다. 학원!

이제부터 학원 뽀개기를 시작해 볼까~~~~??

활활 타오르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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