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이야기>
-다시 태어나도 친해지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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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십대 초반은 바빴지만 지루했다. 아침에 일어나 부리나케 출근을 하고 하루 종일 카피와 비주얼 사이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회의를 하고, 야근을 하고 야근을 하고 야근을 하다 가끔 술을 마셨다. 카피클럽의 첫 정모 이후에도 번개 공지 글이 종종 올라왔지만 영숙이가 참석한다는 댓글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 ‘늦더라도 참석합니다!’란 일성이의 댓글은 교회 십자가처럼 어디서든 보였다. 친해지기 전의 일성이는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웠다. 구수한 외모는 차치하고라도, 광고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충만한 열정으로 밤새도록 이어지는 술자리 토크도 기꺼이 들어준다고 해도, 일성이는 왜 영숙이가 아니고 일성이인가란 존재론적 의구심은 잠시 접는다고 해도, 문제는 일성이의 무지막지한 주량이었다. 나도 술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 편이지만 주량이 센 편은 아니었다. 한계치는 소주 두병! 그 이상은 카피라이터 사수는커녕 회사 대표님이 권해도 마다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또래의 남자가, 더구나 한 살 어린 동생이 내미는 술잔을 거절하기란 수컷들의 세상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성이가 날 취하게 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저 매사에 열심히 임하는 일성이였기에 술도 잔꾀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마시는 것 같았다. 간혹 MSN 메신저로 번개가 있다며 나오라는 초대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야근을 핑계로 고사하곤 했었다. 어느 금요일 퇴근 시간 무렵, 일성이에게 다시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난 또 그럴 참이었다.
일성 : 형님! 금요일인데 퇴근 후 스케줄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 : 야근 아니면 술이지. 퇴근을 해야 퇴근인 거니까 아직 잘 모르겠고.
일성 : 혹시 따귀 드셔 보셨습니까? 종로 뒷골목에 허름한 식당이 하나 있는데 메뉴판에도 없고 단골들에게만 파는 죽이는 안주가 있습니다. 오늘 한잔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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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술 약속을 잡기 전 인터넷 검색은 필수가 되었지만, 삼십대 초반의 내 머릿속에는 맛집이란 개념이 없었다. 그저 양 많고 저렴하고 친절하면 그만이었다. 유명한 식당 앞에서 줄 서있는 사람들을 보면 시간이 남아돈다며 혀를 찼던 것도 같다. 그날따라 어쩐 일인지 호기심이 동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사무실도 모두들 약속이 있다며 순식간에 칼 퇴근 분위기까지 만들어졌다. 딱히 약속도 없었기에 일성이와 종로의 영춘옥이란 곳에서 만나기로 했고 우리의 미식로드는 그날부터 1일이었다. 영춘옥은 일성이 말대로 탑골공원의 어르신들이나 드나들 법한 낡은 식당이었다. 일성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모님! 여기 따귀 하나랑 소주 한 병이요!”라고 우렁차게 외쳤다. 잠시 후 ‘스뎅’으로 된 냉면그릇에 고봉으로 담긴 뼈다귀 고기가 잘 삶아져 나왔다. 가격도 저렴한 단돈 만 원의 행복이었다. 일성이를 따라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으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체인점 감자탕의 육질과는 차원이 다른 노포의 내공이 느껴졌고 소주가 술술 들어갔다.
“어떻습니까? 형님. 입맛에 좀 맞으십니까?”
맛있게 먹는 나를 보며 일성이는 이미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선후배 문화를 중시하는 지방 사람답게 예의 바르게 물어왔다.
“따귀가 뭔가 했더니 맵지 않게 삶은 감자탕 고기였네. 암튼 내가 먹어본 고기 안주 중에 최고다!”
따귀는 육질은 부드러우며 씹는 맛이 살아있었고, 소금간이 전부일 것 같은데 감칠맛이 하늘을 찔렀다. 순식간에 소주 한 잔은 한 병이 되었고, 소주 한 병은 네 병으로 늘어났다. 한계 주량을 넘어 알딸딸하게 취하는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일성이가 귀여워 보인 것이다.
둥그렇고 커다란 머리, 깡뚱하게 자른 헤어스타일, 맨 윗 단추까지 채워 답답해 보이는 피케셔츠, 걸어 다니는 엔타시스 양식이라고 해도 좋을 불룩한 몸매, 호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일성이라고 생각했는데, 따귀 한 그릇과 몇 병의 소주로 일성이가 이웃집 토토로처럼 정겨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성이는 따귀 고기 두 점을 입에 집어넣으며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서울촌놈 형님! 동생 하나 잘 만나서 오늘 입이 호강하시네요.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서울 시내 끝내주는 맛집 데이터가 제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다음번에는 존슨탕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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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에 만난 이태원의 바다식당도 요즘 표현으로 찐 맛집이었다. 의정부 쪽에서 군 생활을 했기에 부대찌개라면 지겹도록 먹었고 원조 맛집이란 곳도 어느 정도 섭렵한 상태였지만 존슨탕은 전혀 새로운 부대찌개였다. 감자와 양배추로 낸 국물은 내 영혼을 어루만져줄 정도로 감미로웠다. 푸짐하게 들어있는 소시지와 민찌(잘게 다진 고기)는 이국적인 식재료가 어떻게 국물을 공략해야 한국사람 마음에 들지 잘 아는 것 같았다. 등을 맞대고 앉아야 할 만큼 비좁았던 낙원상가의 막회집, 도살장을 겸업하고 있을 것 같은 터프한 비주얼의 토종순대집, 지금은 사라졌지만 전주 가맥에 꿀리지 않을 충무로 뒷골목의 충남슈퍼, 한 시간을 기다려 먹었던 용두동 꼼장어, 서울 토박이임에도 태어나서 처음 가본 황학동의 땡초곱창, 고기 한 점에 술 대신 쿨피스 한 모금씩 먹어야 했던 홍대 불닭집까지! 어느새 나는 퇴근 무렵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일성이의 연락만 기다리며 침을 흘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주일에 한 번 보던 일성이를 이삼일에 한 번 보고 급기야는 매일 같이 만나기 시작했다. 나는 애인이 없었고 일성이는 애인이 일본에서 유학 중이라 술 약속의 제약도 없었다. 급기야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이태원에 있던 전세 이천오백만 원짜리 일성이의 자취방에 가서 자고 다음날 각자의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음주 루틴이 돼버렸다. 술에 취해 일성이 자취방에 처음으로 자러 간 날, 나는 일성이의 비밀스러운 파일 노트를 하나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신문이나 잡지 같은 곳에서 각종 맛집 정보를 오려 스크랩한 일성이의 은밀한 보물이었다. 아무 거나 다 잘 먹을 것 같은, 심지어 땅에 떨어진 것도 주위 한 번 살펴보고 쓰윽 주워 먹을 것 같은 일성이가 미식에 탐닉한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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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가 있었다. 교육적인 콘텐츠와 만화가 섞여 나오던 다른 어린이 잡지와 달리 본격적으로 만화만 실린 최초의 잡지로 기억한다. 세상에 만화 싫어하는 어린이가 존재할까. 보물섬은 창간하자마자 당시의 흔한 표현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보물섬의 인기는 만화가 해로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님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반에서 소수의 친구만 매달 나오는 보물섬을 갖고 있었고 우리는 그 만화잡지를 함께 보고 빌려 보고 돌려 봤다. 덕분에 보물섬은 친구를 사귀기 좋은 최애 우정템이었다. ‘보물섬 8월호 집에 있는데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맛집을 함께 다니며 친해진 일성이를 떠올리면 어렸을 적 친구와 함께 보던 보물섬이 생각난다. 사이좋게 배를 깔고 드러누워 보물섬을 보던 어렸을 적 친구처럼, 어른이 되어 만난 일성이는 마치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