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행사 담당 여자가 다가왔다. 한 시간 뒤에 다시 들고 있으면 안 되냐며 사정했다.
나는 피켓을 들고 그냥 서 있다.
경희씨는 꿈쩍도 안 한다.
여자는 가지도 못하고, 말도 못 붙이고 한참 동안 경희씨를 쳐다본다.
경희씨랑 떨어져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다. 무슨 말을 하는지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그냥 서 있다.
출근길 거리에는
김수현 1인 시위.
박상노 1인 시위.
김민정 1인 시위.
그리고 나,
장애인 권리예산 지원촉구 집회.
1인 시위는 내용 아래 자기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든다.
나는 내 주장이 없다.
나는 비장애인으로 옆에 서 있을 뿐, 주체가 아니다.
이번엔 남자 담당자가 온다.
시장님 오면 그땐 피켓을 내렸다가 시장님 가면 다시 들면 안 되냐고 부탁한다.
이번에도 경희씨가 뭐라고 했는지 들리지 않는다,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움직임이 없는 걸 봐서 철수는 아니다.
경희씨가 철수하라면 바로 철수하는 것이고, 경희씨가 있으면 나도 끝까지 있다.
담당자가 포기한 듯 돌아간다.
나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경희씨 판단을 기다렸고, 경희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그대로 진행이다.
우리가 들고 있는 피켓은
‘장애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방해하는 사람이 사라지자 무료로 나눠주는 핫팩을 받아다 피켓을 들고 있는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말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자리가 아니다.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
내가 전달할 일이 아니다.
직접 해야 해소도 되고, 설득도 된다.
나는 집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지키는 사람이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이런 날 아침 집회는 사람을 더 얼어붙게 만든다.
서두른다. 내가 혼자 정한 '연대의 날'은 이틀 뒤지만 오늘은 시의회 앞에 가야 한다.
아무도 없다. 사무실에 앞에 피켓도 없다.
좀 기다려보기로 한다. 직원이 나와서 말을 건다.
“오늘은 혼자세요?”
“아직 안 나왔어요.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오늘은 좀 늦나 봐요.
우리가 아침마다 나와 있으니 불편하시죠?”
변명을 덧붙이고, 미안함을 전한다.
“아닙니다. 추운 데서 고생하시니까 안타깝죠.”
“신경 쓰일 것 같아요. 서로 불편하게 됐네요."
"얼른 해결되면 좋겠어요.”
간단히 담소를 나눈다. 처음이다.
아, 목소리가 중저음이시네. 말투도 점잖으시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인다. 광현씨는 오늘도 목도리가 없다.
내 것을 풀어 얼른 목에 둘러준다. 잠시도 추운 건 용납 못 하지.
씨익 웃는다. 은근 즐기는 듯하다.
생얼을 백옥같은 피부미인이라며 놀린다.
우리끼리 즐겁다.
출근하는 직원이 몸을 웅크리고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어? 잠깐만.
경희씨다.
오늘 인사를 건넨 건 내가 아니다.
다른 직원이 다가온다. 이번에도 경희씨가 인사를 한다.
경희씨가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인사를 한다.
시의회 광장에서 사람들이 지나갈 때 우리는 말이 없었다.
웃고 떠들다가도 고개를 숙이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잠시 멈추고 숨을 죽였다.
서로 보지 않았다.
없는 듯, 못 본 듯 지나쳤다.
이제 말을 섞고, 인사를 한다.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 침묵했던 광장에 말이 돈다.
조용한 광장을 사람 소리로 채운다.
서 있는 것으로 존재하던 경희씨가,
드디어 진짜 연대를 시작한다.
따듯한 기운이 차가운 광장에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