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말을 하는 일

플라톤의 <국가론> 일부를 보고서

by 김호진

정치에 관심이 많지만, 그럼에도 왜 정치인지 잘 모르겠어서 고전을 펼쳐 든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명예 지상주의 국가와 인간이 어떻게 부 지상주의로, 다시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민주정으로, 그리고 마침내 참주 국가와 인간으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 국가의 변화는 곧 인간 영혼의 변화다.


이 과정을 떠올리면 20세기 초 자유주의 이후 대공황을 거쳐 국가사회주의와 전체주의가 등장한 역사, 그리고 이를 정리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겹쳐진다. 더 나아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질서,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2008년 금융위기를 지나 오늘날 트럼프, 시진핑, 푸틴으로 상징되는 스트롱맨의 시대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한 국가와 인간의 변화는 정말 최선자에서 참주로 떨어지는 하강의 경로뿐일까. 참주에서 다시 민주정으로, 과두정과 명예정을 거쳐 최선자의 나라로 올라갈 수는 없을까. 아니면 블랙홀에서 웜홀로 빠져나오듯, 참주제에서 곧바로 최선자 국가로 나아가는 길은 상상할 수 없을까.


SF 작가 테드 창의 바벨탑 이야기는 이 질문에 독특한 비유를 제공한다. 하늘에 닿기 위해 쌓은 탑의 꼭대기에서 하늘을 깨고 나아가자, 건축가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하늘과 땅은 원통처럼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옥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놀란의 『인터스텔라』 역시 블랙홀을 통과하는 일이 손쉬운 탈출이 아니라, 시간과 존재 자체를 건 위험한 통과임을 보여준다. 참주에서 최선자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좋은 삶과 국가를 논하다가, 마지막에는 사후 세계에서 영혼이 나아갈 희망을 이야기한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반지를 끼고 있어도, 정의를 지키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그는 그곳에서 제시한다. 정의는 외적 보상이 아니라, 영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참주에서 최선자로 나아가는 길을 다시 상상하게 된다. 여러 체제를 거쳐 돌아가는 길이든, 원통처럼 곧바로 이어진 길이든, 어떤 경로이든 감당해야 할 비용과 희생은 클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하강만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고, 뉴딜의 미국과 자유진영의 영국이 승리했으며, 이후 또 다른 긴 긴장이 이어졌다.


사실 앞으로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세계와 이웃을, 그리고 내 영혼을 잘 돌보고 듣고,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이성과 욕망의 균형이 무너질 때 혼돈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통찰은 오늘의 뇌과학과도 묘하게 겹친다. 인간은 단순한 기수가 욕망의 전차를 모는 존재라기보다, 여러 힘이 소용돌이처럼 상호작용하며 방향을 만들어내는 존재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가능한 정치는 어쩌면 아주 사소한 실천일지도 모른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지각하지 않고,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영혼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지켜내는 것에서 다시 길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단테가 본 천국의 동심원처럼,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을까. 그리고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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