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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잇 May 22. 2022

글쓰기

발행을 위한 글쓰기

지난주 오후에 쓰고 한 주 동안 올리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장강명 작가의 글이 있었다. 실화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는 글이었다. 마약을 하면 잡혀간다. 과도한 음주는 건강을 해친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고 있다.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펴고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아침에 울고 있었다. g.o.d. 의 <어머님께>를 꿈속에서 뮤직비디오로 나오고 있었다. 소리 내서 꺽꺽 울면 가족들이 놀랄 것 같아 울음을 삼켰다.

생각해보면 그 전날 저녁 독서 모임에서 어머니와 울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어떤 뇌 과학자에 따르면 사람은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한다. 동일시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한다. 남이라고 생각하면 예의를 지킨다. 나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아쉬운 소리도 하고 쉽게 대한다.

사람들은 아직도 몸과 마음을 돌보기 어려워한다. 아플 때는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야 한다. 하지만 돈 생각 때문에 병원을 찾지 않는다. 부읽남의 책을 보니 부자들은 보험에 들지 않고 투자를 해서 돈을 번다고 한다. 아픔에 대해 알아가면 견딜 힘이 생긴다. 혈압이 높다. 아무튼 모임에서 했던 이야기 영향 때문인지 아침에 <어머님께>를 떠올리며 울었던 것 같다. 시원하게 울었으면 어땠을까? 나 혼자만 있었다면 울음을 참지 않고 시원하게 울었을까? 혼자 꺽꺽대는 울음이 어색하지 않았을까?


카페에서 옆에 사람이 다리를 흔드는 게 거슬린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렇게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갑자기 나에게 와서 지금 노트북에 자기 이야기 쓰고 있냐고 따져 묻지는 않겠지? 내 노트북에 뭐라고 썼는지 알게 뭐람. 어쩌면 자신의 핸드폰에 나처럼 내 흉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의식 과잉.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자기 몸을 자기가 간질여 필 수 없다. 요즘 부쩍 혼잣말이 늘었다. 가끔 SNS를 보면 카페 또는 일상에서 지나치는 사람을 알게 모르게 관찰하고 쓴 글들이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 좀 봐'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다리 떠는 게 무척 신경 쓰인다. 나는 아직도 현상만 보고 의사결정을 한다. 현상 너머를 볼 힘이 없다. 넘어가

자. 사람을 외모로 취하다가 큰코다친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방문을 닫을 수 없다. 마음의 문을 닫아야 한다. 나와 노트북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몸짓이 들어온다.


루나가 상장폐지됐다. UST를 10만 원어치 샀다. 1달러 회복에 돈을 걸었다. 한탕주의자가 됐다. 투기꾼이 됐다. 기회주의자가 됐다. 돈은 인격이다.

유튜브에 10초, 20초, 30초짜리 영상을 올렸다. 증명사진처럼 가만히 앉아있다. 카메라 테스트가 이런 걸까? 계속 올리다 보면 콘텐츠가 나오지 않을까? 콘텐츠는 기초 체력에서 나온다. 부동산 투자도 펀더멘털이 중요하고, 빨리 걸을 때도 체력이 바탕이 된다.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체력이 중요하다. 나만의 플라이휠을 찾아라 그리고 돌려라.

물가가 오른다. 푸틴이 전쟁을 그만두면 좋겠다. 인권이고 평화고 일단 먹고 살기 팍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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