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글감을 찾기 위해 각자 떠오르는 단어를 종이에 적어 주머니에 넣고 세 단어를 뽑아 마인드맵을 시작했다. 임의로 뽑은 단어 ‘겨울’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를 지나 횡단 열차로 뻗어나갔다. 어떤 키워드가 방아쇠처럼 당겨지면 그때 생각이 붕 떠오른다. 침전물이 가라앉은 물병을 가볍게 친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삼촌이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돈을 보내주셨다. 조건은 하나였다. 여행 후기를 써라. 하지만 못 썼다. 삼촌도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아직도 러시아 여행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이유다.
러시아를 골랐던 이유는 주변에 가본 사람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훌쩍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바이칼 호수를 지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마지막 도시에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니 자신도 가봤다며 댓글을 다는 친구들이 2명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생긴 것은 엄기호 작가의 <단속사회>를 통해서였다. 책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한 청년이 나온다. 작가는 현대 사회의 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청년을 사례로 들어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만 남았다. 청년은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횡단 열차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서는 북한 아저씨들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빨간 여권을 들고 열차를 타는 아저씨들의 모습에 묘한 흥분이 일었다. 몇 박 며칠 같이 지내다가 헤어질 때가 되었다. 잘 가라는 인사로 가볍게 포옹했다. 아저씨는 블로그 같은 곳에 자기 이야기를 올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열차를 타면서 북한 아저씨를 만나는 이야기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중간에 바이칼 호수에 도착해서는 오래 걸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뭐 하고 있나 싶다가도 다시 걸었다. 한국에서 구매한 여행 책자에 있는 식당과 명소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해서도 여행 책자에 있는 장소들을 확인하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오후가 깊어져 갈 무렵 강을 따라 있는 고리키 공원을 걷다가 사람들이 다리 위의 구조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먼 타국에 와서도 걷기만 하고 적적하던 차에 자극이 필요했다. 사람들을 따라 다리 위를 올라 걸었다. 몇 걸음 걷다 보니 사람들이 뒤돌아 다시 내려오기 시작한다. 공원 요원이 단속을 나왔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 상황에 단속 나온 줄도 모르고 어리둥절 뒤따라 내려가다가 공원 아저씨에게 붙잡혔다. 아저씨는 내게 벌금을 2, 3만 원 되는 루블을 내라고 했다. 말은 잘 통하지 않고, 순순히 내놓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다. 마침 지나가는 러시아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냥 빠져나왔다.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다리 위를 오르는 객기를 부리고, 순찰 아저씨도 따돌린 흥분에 러시아 친구들과 함께 공원을 걸었다. 얼마 걷다 보니 흥분은 걷혔고 몇 안 되는 영어 단어로 주고받을 수 있는 서로의 관심사는 얼마 안 됐다. 우리는 다음 날 미술관 앞에서 만나자는 알 수 없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걷기도 많이 걸었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구글 포토의 8할이 이때 사진이다. 횡단 열차를 탔을 때도 역에서 내릴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을 본 북한 아저씨가 국정원에서 왔냐고 물었다. 모스크바강의 유람선에서 쉬지 않고 계속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어떤 인도 가족 부부도 수군거렸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부지런히 걷고 찍었다.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할 텐데 겨울 하면 떠오르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