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법정물을 자주 본다. <카라마조프가 형제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오펜하이머> 등. 진행되는 재판 속에 피고, 원고, 변호사, 검사, 판사, 배심원 등이 되어 이야기를 따라간다. 나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변명도 했다가 심문도 했다가 이리저리 생각해 본다.
흔히 한국의 교육은 이과와 문과로 나뉜다. 이런 구분이 의미 없고 의미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고정관념은 여전하다. 흔히 이과의 끝은 의사, 문과의 끝은 변호사로 이야기된다. 의사의 꽃이 수술이라면 변호사에게는 변론이리라.
수술실에서 환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별로 없다. 수술 전에 의사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동의서에 서명하고 마취하고서 의사의 손에 몸을 맡긴다.
법정에서도 의뢰인의 역할은 별로 없다. 주로 변호사를 통해서 의뢰인의 입장이 변호된다. 그러라고 있는 게 변호사다. 그래도 의뢰인은 재판 중에 기회를 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피고 할 이야기가 있나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설 또는 영화에서 재판은 많이 봤어도 수술 장면은 별로 보지 못한 이유리라. 물론 편견일 수도 있다. 경험과 기억을 왜곡해서 재판과 수술은 다르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르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생각을 왜곡해서라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도무지 무엇이란 말인가?
쓸만한 아무 말은 없지만 그래도 책은 열심히 봤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를 위한 읽기, 쓰기를 위한 쓰기는 의미 없다" 나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괴롭다.
보르헤스는 인터넷이 태어나기 반세기 전에도 링크를 타고 넘나드는 하이퍼텍스트를 썼다. 동어반복, 모순 등을 글 속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해 무한히 반사되는 거울방처럼 다채로운 글을 보여주었다.
대가들의 삶을 마음대로 각색해서 불러보지만, 허전한 마음은 그래도 가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