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며의 결혼일기 제 17화: 남편의 일기장
1999년 4월 2일 금요일 (날씨: 흐림 후 개임)
어제 비 때문에 신발이 젖어 신고 갈 신발이 없었다.
그런데 설날 때 작은 할머니가 물려주신
축구화가 있었다.
보통 같았으면 그냥 신지 않는다고 할 텐데,
IMF 시대여서 그냥 신고 갔다.
더럽고, 헌 신발이어서 쑥스럽기도 하였다.
그때 생각했다.
IMF는 왜 생기는지를
나는 달러를 막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유행하면 다 사고,
유행 끝나면 다 버리고
그런 게 습관이 들어서
물건을 많이 사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날짜가 처음 보는 노트를 들고 다녔다.
오래되어 바래진 파란색 미키 마우스 노트
웬걸! 득템!
그것은 남편의 초등학교 5학년 때 일기장이었다.
‘분명 엄청 유치하고 웃기겠지’
남편을 열심히 놀려 줄 생각으로
한자 한자 읽어 내려간다.
초등학교 5학년이 ‘IMF’를 언급하며
어른인 척하는 모습에 웃다가,
물려받은 헌 운동화를 신고 쑥스러웠을
남편의 발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다.
그리고 문득
결혼 내내 정말 이해되지 않았던
남편의 습관이 떠오른다.
“여보, 이렇게 구질구질한 티셔츠는 버리면 안 돼?!”
남편은 아주아주 오래된 물건도
잘 버리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물건들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곳은 단연 옷장!
걸레로 써도 될 것 같은,
이미 옛날 옛날에 버려도
하나도 안 이상할 옷들을
남편은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여보 이런 옷 입고 다니면,
이젠 내가 욕먹어 좀 버리자”
“안돼. 그냥 놔둬 나는 이런 옷이 제일 편하단 말이야.
버리기만 해봐 네 책 다 버려 버릴 거야”
아니, 내 책과 이 옷이 동급이란 말인가?! (충격)
전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책을 버리겠다는 협박이 두려워서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불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른 티셔츠도 있는데
왜 굳이 구질구질 한 구멍 난 티셔츠가 편하다는 걸까
결혼 후,
나는 가끔 말문이 막힐 정도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을 종종 접하곤 했다.
그 일들은 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었는데,
그건 당연히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지금의 남편을 만든 것은,
나를 만나기 전 남편이 겪어온 상황들이니까
나는 그 나이에 IMF를 걱정하지도 않았고,
물려받은 헌 운동화를 신고 간 일도 없으니까.
‘운동화 사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또 이상하게도 남편의 일기장을 보고 나니,
나는 남편의 ‘옛 물건을 버리지 않는 습관’ 이 좋아진다.
‘적어도 이런 사람과 함께 라면
우리가 나중에 함께 추억할 물건들이 분명 많을 거야.’
오래된 물건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남편이 참 좋다.
나는 물건은 아니지만,
옷 아끼는 만큼 오랫동안 아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