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out vs. Midlife transition
처음에는 '번아웃'이라고 생각했다.
호주에서 영주권을 목표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고, 그 과정이 평탄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피곤한 건 당연했고, 감정이 예민해진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이유를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오래 버텼으니 지친 거라고 정리하는 편이 편했다.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았고, 하루를 시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집중은 쉽게 흐트러졌고, 작은 일에도 감정이 크게 반응했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걸 '번아웃'이라고 불렀다. 조금 쉬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번아웃'과 '갱년기'는 겉으로 보면 비슷하다.
피로감이 쌓이고, 의욕이 줄어들고,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 그래서 대부분은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실제로 나도 그랬다.
그러나, 차이는 조금씩 드러났다.
쉬어도 회복이 되지 않았고, 환경이 달라져도 상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유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며, 밤에 잠을 자다 땀을 흘리며 깨는 일이 잦아졌다. 감정은 설명 없이 튀어나왔고,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의지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몸의 반응이 너무 앞서 있었다.
병원에서 들은 말은 예상과 달랐다.
'번아웃'이 아니라 '갱년기'라는 진단이었다.
게다가 '갱년기'가 비교적 빠르게 시작된 편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단순히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된 스트레스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영주권을 목표로 살아온 시간 동안 몇 년씩 불확실한 상태를 견디는 과정에서, 몸보다 뇌가 먼저 부담을 받았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 호르몬을 조절하는 시스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지난 몇 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설명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 지난 시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무리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멈출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긴장을 유지했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 몸이 먼저 반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일기를 썼다.
그날의 상태를 적고, 감정을 풀어내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쉽게 중단되었다. 컨디션이 나쁘면 미뤄졌고, 며칠 비어 있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나와의 약속은 가장 쉽게 조정되었다.
그러나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글쓰기를 일과 비슷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글을 쓰는 시간을 따로 떼어냈다.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약속이기 때문에 쓰는 날이 늘어났다.
그 시간 동안 생각이 한 방향으로 모였다.
산만하게 흩어지던 감정이 문장 안에서 정리되었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에 집중하는 습관이 생기자 생활의 리듬이 조금씩 돌아오며, 변화는 서서히 나타났다. 갑작스럽지 않았고, 드라마틱하지도 않았다.
'갱년기'는 단기간에 지나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극복'이라기보다는 조절에 가까운 상태였고, 글쓰기는 그 조절의 역할을 했다. 약으로만 버티는 방식이 아니라, 생활 안에서 균형을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
1년 정도가 지나자 상태는 눈에 띄게 안정됐다.
예전과 완전히 같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상을 유지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감정의 진폭도 줄었고, 수면의 질도 나아졌다.
얼마 전 정신과 상담에서 약을 중단해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갱년기 때문에 복용하던 우울증 약이었다. 경과를 지켜본 결과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난 1년의 시간이 하나로 이어졌다.
'번아웃'과 '갱년기'는 닮아 있지만 방향이 다르다.
번아웃은 환경이 원인인 경우가 많고, 갱년기는 몸이 먼저 반응한다. '번아웃'은 쉬면 회복의 실마리가 보이지만, '갱년기'는 생활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오래간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 구조였다.
일기가 아니라, 독자와의 약속이 있는 글쓰기였다. 그 약속이 하루를 붙잡았고, 그 하루들이 이어지면서 상태가 달라졌다.
지금도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다.
다만 이전처럼 이유 없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몸의 변화를 감당하는 방식이 생겼고, 그 방식을 생활 안에 두고 있다.
이 상태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