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2년 차 남편이 뒤늦게 알게 된 식탁의 의미
어제와 오늘은 쉬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부터 몸을 많이 썼다.
어떤 날은 쉬는 날이 더 바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미뤄 두었던 집안일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내는 머리 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갔다. 나는 더워지기 전에 마당으로 나가서 잔디를 밀고 화단을 정리했다. 마른 가지를 잘라내고 흙을 고르고 물을 주었다. 햇빛이 강해지기 전에 끝내야 하는 일들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니 또 할 일이 보였다. 직업이 셰프라 그런지 냉장고 속 재료가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어제 사 온 마늘종과 무를 꺼내어 적당한 크기로 썰어 병에 담고 달콤하고 새콤한 피클을 만들었다. 며칠 뒤 식탁에 올리면 입맛을 살려주는 반찬이 된다.
그렇게 오전이 꽉 찼다. 몸은 조금 지쳤지만 마음은 괜히 뿌듯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염색이 끝났는데 쇼핑센터로 나와 함께 점심을 먹자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소파에 누워 있었다. 아침에 쏟아부은 힘이 갑자기 바닥난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밖에 나갈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잠시 후 전화가 다시 왔다. 정말 나오기 싫으냐고 물으며, 혼자 점심을 먹고 들어가겠다는 말도 이어졌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맛있는 거 먹고 오라고 말했다. 들어오는 길에 빵가게에 들러 빵 몇 개만 사 오면 나도 그걸로 점심을 해결하겠다고 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고 나는 소파에 누워 졸다가 휴대폰을 보다가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카톡이 도착했다. 점심을 다 먹었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어진 한 줄.
"눈치 없는 사람."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아무리 밥 생각이 없어도 혼자 식당에 앉아 밥을 먹을 사람을 생각하면 앞에라도 앉아 있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이렇게 눈치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냐는 말도 덧붙어 있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 있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아내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이를 챙기고 내 뒷바라지를 하며 대학에서 공부까지 하는 바쁜 사람이다. 쇼핑센터에서 천천히 점심도 먹고 여유를 즐기다 돌아오면 좋겠다고 여겼다. 그것이 배려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해외에서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관계는 단순해진다. 한국에 있을 때처럼 친구를 쉽게 만날 수도 없고 가족을 찾아가기도 어렵다. 결국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점심을 너무 가볍게 넘겨버렸다.
혼자 밥을 먹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날의 혼자는 이상하게 쓸쓸하다.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 자리만 조금 비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내가 원했던 것은 거창한 점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싼 음식도 아니었을 것이다.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있는 사람, '바로 나'였을 것이다.
나는 음식을 만드는 일을 오래 해왔다. 수많은 손님을 위해 식탁을 준비해 오며 접시의 균형을 맞추고 맛을 조절하고 마지막 장식을 고민하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그런데 정작 진짜 식탁은 음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식탁이 된다.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22년이 지났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를 잘 안다고 믿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생긴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작은 신호를 살펴야 한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예의를 지키면서도 바로 옆 사람에게는 마음을 대충 건네는 순간이 생긴다.
오늘 점심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일이다. 그런데 아내가 혼자 밥을 먹었을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식당의 작은 테이블과 그 앞에 비어 있었을 자리 하나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아마 다음에 비슷한 날이 오면 나는 조금 귀찮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냥 아내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맞은편 자리를 채우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한 끼의 식사는 충분히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의 맞은편 자리는 앞으로도 평생 내가 채워야 할 자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