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방하착(放下着)함이, 간절함 보다 나을 때도 있다.
'방하착(放下着)은 불교에서 화두로 주로 쓰이는데, 마음속의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마음속에 한 생각도 지니지 말고 텅 빈 허공처럼 유지하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설마 이번에도 태평양에서 선박이 고장 나진 않겠지?’
짐을 천천히 싸면서도 뇌리에는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호주 생활을 거의 접은 상태라 아내와 농담도 나누고, 한국에서 뭘 할지 미래를 그려보는 나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2주 후, 금요일 밤 12시.
아이엘츠 점수 발표의 순간이 다가왔다.
노트북을 열고 사이트에 접속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생년월일 입력. 시험 날짜 입력. 수험번호 입력.
마지막으로... 확인 버튼 클릭.
"아, 오늘따라 버퍼링이 왜 이렇게 길어? 다들 이 시간에 결과 보려고 난리 치는 거야 뭐야?"
그 순간..........
"어? 뭐지?" "와 아아아아 아!!!!!!!!!!"
거실을 뒤흔드는 초고음 나의 절규.
7.0... 7.0 이야! Each band 7.0!!!
내 머리는 이미 비행기 없이 하늘을 날고 있었고, 심장은 "지금이 터질 시간이다!!" 하며 도파민을 폭발적으로 방출했다.
아내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또 확인. 또 확인.
"진짜네?"
"진짜야!!!"
"우리 한국 안 가도 되는 거 맞는 거지?"
서로의 볼을 꼬집었다.
"드라마에서만 볼 꼬집는 줄 알았는데, 이거 실화냐!! 하하하!!"
그리고 우리는 갑자기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자기야! 빨리 법무사님한테 전화해서 영주권 서류 넣으라고 하자!"
나는 초광속으로 법무사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때, 등짝 스매시 한 방...
"아무리 좋아도 지금 몇 신데?? 미쳤어?? 자고 아침에 해!!" 아내는 이내 침착하게 나를 달랬다.
"아니, 지금 잠이 와? 응? 잠이 오냐고??"
...당연히 안 왔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야호! 야호!’를 수천만 번 외치며 밤을 새웠다.
아침 정각 9시.
바로 법무사님께 전화했다.
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받으셨다.
"실장님!!!" 다급하게 전화기로 법무사님을 불렀다
"아, 민호 씨! 영어 점수받았군요?"
"...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침부터 이렇게 들뜬 목소리로 전화하면 뻔하죠. 후훗!"
"감사합니다, 실장님! 빨리 영주권 신청 들어가 주세요!!"
"... 아, 그런데 오늘 토요일이라서요."
"... 아, 맞다. 오늘 토요일이네. 죄송해요. 너무 기뻐서 그만..."
"월요일 아침에 성적표 받으시고 바로 오세요. 서류는 다 준비됐어요!"
"네! 감사합니다, 실장님!!"
그 후 부모님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스터디 그룹 단톡방에도 메시지를 보냈다.
결과?
휴대폰, 4시간 만에 배터리 방전.
2011년 5월 23일 월요일.
마침내, 영주권 서류가 이민성에 접수되었다.
브리즈번에 첫발을 디딘 지 정확히 1379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머릿속이 하얘졌다. 기쁨과 안도감이 밀려오기도 전에 ‘드디어 끝인가?’ 하는 묘한 감정이 스쳤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그날 밤, 속이 후련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뒤척였다.
'도파민 과다 복용 때문인가?'
‘이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혹시라도 내 서류에 문제 생기면 어쩌지?’
불확실함이란 녀석은 늘 그렇듯, 한 치의 틈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처음 제 에세이를 접하시는 분들께*
2권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웰던인생, 미디엄레어 꿈"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 1권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있고 생생하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정주행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oju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