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전날 밤, 나는 무심한 척 아내에게 물었다.
"한국에 돌아가도 괜찮을까?"
아내는 순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뭐, 어쩌겠어?... 자기도 할 만큼 했는데...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안되면,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야지."
그 말이 더 아팠다.
운이 없었다고? 나는 이 모든 게 운 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탓이었다. 내가 부족했고, 내가 실패한 거였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나를 끝까지 감싸주려 했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혹시 내일 시험 보고 오면, 한국에 짐 부칠 수 있게 해외 이사 한번 알아보자."
"전에 이용했던 해운회사 전화번호 아직 가지고 있지?"
아내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난 괜찮으니까, 맘 편히 시험이나 보고 와. 내일 다시 얘기하자."
위로하려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포기’라는 단어로 들렸다.
다음날, 나는 마지막 시험을 보았다.
졸업생 임시 비자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더는 시험을 볼 기회가 없었다. 마지막 시험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오늘은 오히려 담담했다.
"오늘따라 느낌이 더 안 좋네..."
"이번 시험엔 정말 사심 없이 마음을 비우고 봤는데..."
"아... 이제 난 여기까지인가?"
그동안 영어 점수에 목덜미를 잡혀 어쩔 수 없이 귀국했던 수많은 학생들을 봤었기에 내 맘은 더 불안해졌다.
그리고, 시험을 망쳤다는 느낌보다 더 나쁜 감정이 밀려왔다. 바로 "패배감".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뭐라고 하지?’
"호주 간다고 설레발치더니 결국 돌아왔네."
"그 나이에 무슨 도전이야? 그냥 다니던 직장이나 잘 다니지.""쯧쯧, 꼴좋다."
내가 떠나올 때의 모습과, 돌아가야 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교차됐다.
'이대로 끝인 건가?'.
터덜터덜 힘없이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나를 보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 많았어. 가서 씻고 좀 쉬어. 저녁 금방 차릴게. 소주 한잔 할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씻지도 못하고 그렇게 서서 한참을 울었다.
얼굴을 감싸 쥔 손 사이로 뜨거운 물이 흐르고, 눈물이 함께 섞였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끝났다.
나는... 루저다.
온몸이 무거워서 샤워기 밑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흐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어떡하지?..."
저녁,
아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정성껏 차린 반찬을 놓고 얼음처럼 차가운 소주를 내 앞에 따라주었다.
"이거 마시고 머리 좀 식혀. 어차피 결과는 2주 후에 나오잖아. 결과 보고 귀국 준비해도 안 늦어. 그동안 일하고 공부하느라 호주 살면서 여행 한 번도 못 갔잖아.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주를 한 잔, 두 잔. 몸이 나른해질 정도로 취기가 올랐다.
"잠깐 찬바람 좀 쐬고 올게!."
거실 발코니로 나와 싸우스뱅크 공원을 내려다봤다.
10층에서 바라본 공원은 너무 조용했다.
평화로운 야경. 평화로운 사람들. 하지만 내 마음속은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는 나쁘기만 한 걸까?"
그때, 불쑥 떠오른 생각.
'앞으로 내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루저라고 생각할까?'
그때, 머릿속에서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넌 실패자야."
"봐, 내가 뭐랬어? 네가 성공할 거라고?"
"호주에서 자리 잡겠다고? 웃기고 있네."
너무 시끄러웠다. 짜증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존심 하나 믿고 살아온 게 내 인생인데!!......'
'영어 때문에 시작했는데, 결국 영어 때문에 무너지게 되는 건가?......'
그리고, 아주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자기야, 설거지 다 했으면 잠깐 나와 밤공기가 좋네!' 나는 조용히 아내를 불렀다. 그리고 아내도 말없이 내 옆에 서서 공원 쪽을 보았다.
그때 나는, 조용히 공원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기서 이 사람을 밀어 떨어트리고,
나도 떨어지면.......'
"자기야... 미안해."
"난 루저라는 낙인이 찍힌 채 한국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
"그동안 날 믿어주고 지원해 줘서 고마웠어."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온몸이 떨렸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이 가빠졌다.
몸이 얼어붙고, 손끝이 떨렸다.
'아, 나는 못 하겠다...'
너무 두려웠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다리가 풀리면서, 힘없이 손이 아내의 허리 밑으로 떨어졌다.
아내가 이상한 기색을 감지하고 돌아봤다.
"뭐 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술 취했으면 들어가서 일찍 자!"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유세 떨지 말고, 빨리 들어가! 이 아저씨가 술 한 잔 하시더니 정신을 못 차리시네!"
그리고 아내는 나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자기야... 잠시 나쁜 생각 해서 미안해."
"당신이 무슨 죄가 있다고... 나를 믿어준 게 죄가 아닌데... 나만 죽으면 되는데..."
그날 밤, 결국 나는 블랙아웃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루저가 되어버릴 모습의 내가... 너무 싫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불안감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제 에세이를 접하시는 분들께*
2권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웰던인생, 미디엄레어 꿈"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 1권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있고 생생하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정주행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oju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