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우리 좀 더 스트레스 덜 받고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알피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평소에도 유난히 머리를 쓰는 타입이었던 알피, 이번엔 뭔가 진지했다. "이번엔 정말 너에게 좋은 제안이야. 규모는 작지만 급여는 더 주고, 몸도 덜 힘들 거야..."
사실 알피는 이미 그때 체력도, 정신도 거의 바닥을 친 상태였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눈도 제대로 못 붙이고 근무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 갇혀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레스토랑의 헤드셰프였다.
'헤드셰프'라는 말이 멋지게 들릴지 몰라도, 현실은 쉬는 시간 0분, 식사는 스탠딩, 화장실도 타이밍 봐가며 가야 하는 삶이었다.
늘 불이 난 듯 뛰어다니고, 소스는 손보다 입으로 조절하고, 대화는 항상 “F**k!!”과 “How long?”으로 시작하고 끝났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장난처럼 말했다.
“셰프!!, 별명 하나 만들자. Ten, Ten, Ten!.”
알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뭔데 그게?”
“아침 10시 출근, 밤 10시 퇴근, 쉬는 시간은 10분도 없는 남자.”
그 순간 알피는 한참 웃더니, 진심 어린 한숨을 쉬었다.
그 뒤로 주방에서 알피를 부르는 호칭은 자연스럽게 "Chef Ten"으로 바뀌었다.
그는 웃으면서도, 눈빛은 이미 멀리 떠나고 있었다.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을 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뭔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묻어 있었다.
"OK!!!"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알피와 함께라면 어떤 곳이든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2011년 10월, 브리즈번 차이나타운 한복판, Fortitude Valley에 위치한 Tempo Hotel로 향했다. 뭐, 이름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템포 빠르게 일할 것 같지만,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3.5성급이라는 애매한 급수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고전적인... 50년도 더 되었을 것 같은 외관에 내부 분위기는 세련되면서도 살짝 허술했고, 주방도 어딘가 정겨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좀 정신없었다. 하지만 그 정신없는 곳에서 나는 "Permanent Part-Time Demi Chef"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무려 1년 6개월 만의 승진이었다!
‘승진’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뭔가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알피 말처럼, 급여는 더 받고, 몸은 덜 굴리는 구조라는 거. 이 얼마나 멋진 공식인가!
게다가 때때로 알피가 휴가라도 가는 날엔, 내가 수셰프 역할까지 대신했는데, 그럴 땐 또 특별 수당이 따로 나왔다. 즉, 요약하자면... "일은 덜 하고, 돈은 더 받는 황금 구조. 바로, 이거지!"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출근 첫날부터,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뭐야 이건!!!.” (영어로 WTF!!!)
Tempo Hotel의 주방은 정말 특이했다. 일반적인 호텔 주방은 대형 연회 요리를 담당하는 Banquet Kitchen과 정식 코스 요리를 다루는 A la carte Kitchen이 나뉘어 있는데, 이곳은 그런 거 없다. 그냥 한 공간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쉽게 말해, 칵테일파티용 카나페(Canapé Function)를 만들면서 동시에 고객들의 A la carte 서비스까지 다뤄야 했다.
처음엔 ‘뭐, 그냥 좀 바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바쁜 게 아니라 거의 요리 서커스였다.
서비스 시간이 시작되면 주방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돌변했다.
한쪽에선 웨이터들이 카나페 트레이를 들고 들락날락 뛰어다니고, 다른 한쪽에선 메인 요리 주문이 폭주한다.
물론 팀을 나눠 요리하고 서비스는 했지만, 일이 몰리면 구분이고 뭐고 없이 전원이 투입되는 구조였다.
“야! 저 트레이 올려! 메인 들어간다! 아냐, 지금 카나페 먼저야?!”
정신없이 요리하다 보면, 웨이터들이 환하게 웃으며 외친다.
"Five more minutes, Chef!"를 외치며 주문을 추가했다. 나중엔 이 "Five more minutes"이 '거짓말쟁이들의 맹세'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Tempo Hotel에서의 하루는 예측 불가능한 서커스 쇼와도 같았다.
이 요리 서커스단에서 나와 알피는 매일 공중 그네를 타듯 위태롭게 버티며, 동시에 끊임없이 고민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게 우리가 원했던 삶이 맞을까?’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혼란과 소란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웃었다.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트레이 사이에서, 밀려드는 주문 속에서도, 이상하리만큼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버텼다.
어느새 우린 또 다른 도전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었다.
Tempo Hotel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승진이나 수당을 넘어, 내게 진짜 중요한 걸 가르쳐주었다.
주방에서의 미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
그 끝은 어디일까?
글쎄,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끝이 어딘지 몰라도 우리는 그 과정을 충분히 즐길 줄 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주방이든,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요리사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진짜 주방의 미친 일상인지도 모른다.
*처음 제 에세이를 접하시는 분들께*
2권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웰던인생, 미디엄레어 꿈"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 1권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있고 생생하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정주행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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