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자만 = 참담"의 공식 성립

"복귀의 기쁨, 그리고 예기치 못한 대가"

by 호주아재

모두의 환영 속에, 나는 거의 4개월 만에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나는 칼 대신 펜을 들고, 프라이팬 대신 시험지를 넘기며 살았다. 아이엘츠라는 낯선 도전에 온 정신을 쏟았고, 문법과 단어, 발음 하나하나에 목숨을 걸며 살아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익숙한 냄비와 불꽃, 철판과 향신료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 마치 무대 뒤에서 오랜 시간 숨죽이고 기다리던 배우가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다시 오르는 순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간이 날 때면 나처럼 영어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는 셰프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주곤 했다. 주방을 잠시 떠나 전혀 다른 전쟁터에서 싸웠던 그날들을, 마치 먼 길을 떠났던 모험담처럼 풀어놓으며 함께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정신없이 바쁜 주방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렇게 분주한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예고 없이 불운이 문을 두드렸다.
인생은 늘 가장 익숙한 순간에, 가장 낯선 시련을 던져준다.

그날도 평소처럼 고기 손질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Beef 등심에서 지방을 잘라내고 포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Claw Grip' (일명:타이거 핑거)이라는 주방의 기본적인 칼질 방법을 잊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칼질을 하고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옆 셰프와 잡담에 집중한 나머지 방심을 했다. 그 순간, 칼이 내 왼쪽 엄지 손가락을 가르고, 살과 손톱의 3분의 1이 잘려 나가 버린 것이다.

● Claw Grip이란? 칼질할 때 손가락을 호랑이 발톱처럼 오므려서 자르는 방법이에요. 이 방식은 손끝이 칼날에 가까워지지 않게 해 줘서 안전하고, 칼질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 순간, 나는 내 손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쓸려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칼날이 피부를 가르고, 통증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내 몸의 한 부분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엄청난 양의 붉은 액체가 손끝에서 흘러내리면서 내 몸이 손상되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 고통과 피의 흐름이 어우러져 마치 내 몸의 일부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셰프 두 명이 급히 달려와 응급처치를 해주었고, 나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봉합 치료를 받으며 의사로부터 칼날이 뼈까지 닿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아직 수습생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주니어 데미셰프로 승진했다고 해서 ‘완성된 요리사’가 된 것도 아니었다. 칼을 다룬 세월보다, 내 안의 자만이 더 날카로웠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칼질 하나에도 다시 숨을 고르게 되었고, 주방의 문을 여는 그 순간부터 내 마음도 함께 여는 법을 배웠다.

요리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날마다 스스로를 단련하고 돌아보는 길이라는 걸.
불 앞에서 흘리는 땀은 단지 맛을 위한 게 아니라, 사람을 빚는 도구라는 걸.

그 피 한 방울은 내게 상처였지만, 동시에 나를 바꾸는 시작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그날의 통증을 기억하며, 더 깊은 책임감과 겸손함으로 칼을 든다.
주방은 여전히 치열한 전장이고, 나는 오늘도 그 안에서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

*처음 제 에세이를 접하시는 분들께*

2권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웰던인생, 미디엄레어 꿈"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 1권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있고 생생하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정주행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oju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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