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인
나는 삼 형제 중에 막내다.
첫째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연락을 안 하고 둘째는 호주로 이민을 갔다.
그렇게 남은 나는 어머니와 살고 있다.
지난겨울 이민 간 형이 15년 만에 한국에 왔다.
많이 늙어 있었고 나에게 왜 이렇게 늙었냐고 했다.
나는 늦둥이고 형과 10년 차이가 난다.
이제 내가 오십이니 형은 환갑이다.
호주에 가서 PC방을 하다가 최근에 정리했고 한국이 유행이라며 치킨집을 하고 싶다고 온 것이다.
원래 친하지 않았지만 15년 만에 봐서 더욱 어색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 시국에 외국에서 병균 갖고 오는 것 아니냐고 싫어하셨다.
15년이라는 시간은 반가움보다 어색함을 키웠다.
어머니는 건강 때문에. 나는 일 때문에 가라앉아 있었다.
외향적인 그는 오랜만의 귀국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들떠있었다.
그의 큰 목소리와 적극적인 행동에도 어머니와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낮에는 요란하게 청소하고 저녁에는 시장 음식을 잔뜩 사 와서 먹었다.
“호주는 이런 맛이 안나”
어머니와 나에게 먹어 보라고 했다.
낡았다 싶은 것은 모두 버리고 정리 정돈을 본인 기준으로 해놓아서 어머니와 나는 뭘 하려면 형을 통해야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 좋아하는 그는 바빴다. 장사를 배우러 온 건지. 뭔지.
나는 형들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도망갈 수 있을 때 먼저 행동했고 이제 나만 남은 지라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그래도 둘째 형은 최소한의 관심을 보인 지라 화를 내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의지하거나 도움을 얘기할 상황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고 어머니도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치킨집 준비한다던 그는 건너 건너 소개받은 실내 포장마차에 밤마다 나갔다.
배운 것이라며 제육볶음, 닭볶음탕, 각종 무침 등의 밑반찬을 만들었다.
저렇게 일상적인 음식을 굳지 여기까지 와서 배워야 하나 생각이 들었고 늘 그렇듯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3주 정도 되었을 때 포장마차는 이제 가지 않았다.
치킨집에서 일을 좀 해보기를 원하는 눈치였는데 마땅한 계획은 없어 보였다.
프랜차이즈보다는 맛집이라고 불리는 로컬 치킨집을 선호했다.
이 집 저 집 사 와서 먹어 봤지만 내 입맛에는 프랜차이즈 치킨보다 못했다.
돈 좀 주고 비법 전수받겠다는 생각부터 고루해 보였다.
친구들 수소문해서 bbq 매장을 연결해 주었다. 3개 정도 운영하고 하나 더 오픈을 준비 중인 수완이 있는 친구를 찾았다.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흔쾌히 도와주겠다 했고 일을 도와가면서 조리기술과 매장 운영을 배우기로 했다.
다양한 맛을 봐야 한다며 이삼일에 한 번은 치킨을 사 왔다.
홀을 운영하는 매장과 배달만 하는 매장을 바꿔가며 다녔다. 장사라는 것에 15년 전과 달리 산업화되어 있는 것을 느끼는 눈치였다.
힘들다는 말은 안 했다.
붙임성이 있는 터라 매장의 젊은 직원이나 매니저를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같은 원주 사람이니 학교 같은 거 따져서 선배 대우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한편에 있어 보였는데 나이 말고는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자 특이하다고 얘기를 한다.
호주에서는 그래?
거긴 안 그렇지. 나이도 안 물어보지. 여긴 한국이잖아.
15년 동안 호주 버전으로 살았어도 한국 버전은 한쪽에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그 버전은 15년 전 것이다.
대화를 하다 보면 옛날 스타일이라는 얘기를 자꾸 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가 그 당시보다 성숙했고 지금 이게 맞다는 얘기를 했고 외향적은 그는 8,90년대를 그리워했다. 본인이 젊었고 잘 나가던 시절, 이제 한국에서도 볼 수 없는 분위기.
한 달은 금방 지나갔고 결국 출국 일정을 한 달 더 연장했다. 그 덕에 설을 같이 보냈다.
20년 전에는 큰형 가족, 작은 형 가족 해서 열명이 제사를 지내다 모두 떠나고 어머니와 단둘이 제사를 지냈다. 잠깐 가족이 늘었다.
초반에 친구들을 많이 만나더니 한 달 정도 지나자 시들해졌다.
답답하다고 했다.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고 아직 건강하니 나이 같은 건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인생 다 끝나고 마무리를 준비하는 게 답답했다.
게다가 시끄럽고 교양 없다고 했다.
호주에서의 장사는 중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현지인들은 이제 한국을 알게 되었지 열광하는 수준은 아니고 중국 유학생이 한국을 좋아한다고 한다.
근데 형은 중국 이민자를 싫어했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고 길거리 흡연이나 공공질서에 둔감한 모습이 싫다고 했다. 근데 그들 덕에 먹고살려고 장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한국 친구들의 모습이. 환갑의 친구들의 모습이 그들과 비슷했다.
그래서 낮에는 그냥 집에 있었다. 청소할 것도 없었다. 눈이 오지 않는 호주에서 눈 구경하려고 겨울에 왔는데 치악산을 앞에 두고도 가지 않았다.
초반에 친구들과 등산 계획을 짰다가 어머니가 갑자기 안 좋아지는 바람에 병원에 모시고 가느라 취소를 했었다. 한국 운전면허가 없기에 혼자 움직이려면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서인지 가지 않았다.
어머니 모시고 당일치기 동해안 한번 갔다 온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한 달도 보내고 출국날이 되었다.
10시 인천공항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여유 있게 5시에 일어나 출발했다.
어둠 속 차 안은 조용했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 못해본 것, 못 먹어 본 것이 많았다. 아니해본 게 별로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좀 더 신경 써 주고 같이 해 줬어야 했다는 후회가 생겼다. 미안했다.
초반의 어색함과 탐탁지 않음은 어떻게 보면 텃세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타인에게 벽을 세우듯 그를 대했다.
어머니와 나의 행동이 섭섭함을 줬을 것 같다.
조용한 차 안에서 형도 잠을 자지 안았다.
말도 없었다.
라디오 주파수가 제대로 맞지 않고 네비의 과도한 안내와 경고음이 계속 거슬렸다.
공항에 도착하고 이제 조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형이 커피와 빵을 사줬다. 고마웠다고.
차에 타서 돌아보게 된다.
공항 창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그를 지켜보았다.
이제 어머니 돌아가실 때나 한번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