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있는 줄 알았어요
물레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체험은 맛만 보는 것이고 배우고자 한다면 실패도 하고 재미없는 것도 해야 한다.
중심 잡기, 성형, 굽깎기 등의 시작과 끝을 시범 보이고 설명했다.
그리고 직접 해보기에 들어갔다.
물레는 바로 그럴듯하게 뭘 해내기가 어렵다.
그 비슷한 것도 일상에서 해보지 않았으니 낯설고 예측 안 되는 상황에 긴장도 된다.
속도 조절하랴 성형하랴 손가락 모양조차 컨트롤이 안돼서 쥐가 난다.
일일 체험의 경우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준다. 배움 보다 결과물이 목적이므로 초보자에게 어려울 부분은 내가 진행하고 잘못되어 간다 싶으면 바로바로 수습한다.
맛보기가 아니고 배우고자 한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정기수강을 해야 한다. 물레를 찰 줄 알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형태가 상당히 다양해지고 생산 속도도 빨라진다.
자유를 얻게 된다.
처음 해보면 당연히 실패하고 설명을 들어 이해하고 머리로 이해한 것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그러는데 이 분은 다시 새로 하면 되는 실패에 대해서 상당히 난감해했다.
다른 곳에서 일일체험을 했었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제대로 배워보려고 했다고..
근데 어렵다고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난처해했다.
처음부터 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어요.
다 그런 거라는 설득작업은 소용이 없었다.
정기수강은 취소하고 일일체험으로 그냥 마무리 지었다.
선 듯 이해가 안 됐다.
그릇이 좋아서 어떤 걸 만들고 싶어서 물레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하려고 했다?
외국인이랑 대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영어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공부한다는 얘기인가?
물레는 도자기를 만드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이고 시간이 필요하지만 누구나 결국 해내는 것인데..
목적이 아니라 도구일 뿐인데.
아쉬웠다.
물레 배우고자 정기수강을 하면 몇 개월간 고객이 되는데, 돈벌이를 놓친 아쉬움이었다.
내가 가르쳐주는 방식이 안 맞을 수 있으니 일일체험했던 곳에서 배워보시라고 했지만 이미 포기한 듯했다.
그때 만들어 놓은 저그와 꽃병은 몇 개월째 찾아가지 않고 있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은
친구들이 잘 한다 하고 칭찬해주니 그게 좋아서였을 것이다.
남보다 잘한다는 것.
어떤 작가도 어린 시절 별거 아닌 글에 해주셨던
선생님의 한마디 칭찬이 지금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는 말의 마음이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해된다.
아쉽다는 것은 변화가 없지만 아쉬운 이유는 달라졌다.
비난적 시선.
옳고 그름까지 갈게 아니라 인식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이 있다.
성인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지구가 공전하는데 옳고 그름이 있겠는가.
강물이 흘러가는 게 싫으면 어쩌겠는가.
존중의 폭.
공방 슬로건으로 '성숙한 취향'을 생각했다.
뭐가 성숙인 것인지. 슬로건으로 걸었으면 좀 더 확실히 정의 내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맨날 하는 고민을 또 해보았다.
도자기인지 플라스틱인지 구별 못하는 친구를 보며 모자르다고 생각하고
수제품인지 수제품을 흉내 낸 공장 제품인지 구별 못하는 친구를 보며 한심해했다.
파전집 가면 모자르고 한심한 친구들이 한 마디씩 한다.
플라스틱이야.. (이 놈들아)
뒤집어 바닥을 봐. 공장 찍혀 있잖아. (이 놈들아!)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좋고 나쁨을 따지게 되고
옳고 그름으로 끌고 와 논쟁하고
이겨 보려고 얘 쓰다가 깊이가 생기고
특성에 따른 활용법을 알게 되고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게 되고
이렇게 들끓었다가 잦아든 상태가 성숙인 것 같다.
'물은 물이고 뫼는 뫼로다'
커피나 와인 같은 걸 이렇게 저렇게 접하고
이런저런 지식 쌓고
이게 좋니. 저게 좋니. 니는 왜 그렇게 사니.
취향으로 우월감을 갖으려 하고
그렇게 열정을 소비하고 나면.
다 그렇지 뭐.
어쩌라고.
다 좋아.
이런 식으로 평온을 찾는 것.
그러고 나면
뭐는 뭐에 좋고 뭐는 어쩔 때 쓰고
어떤 것과 함께하면 좋고..
생활이 풍성해진다.
다양한 것을 복잡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채로운 선택지를 통해 내면의 불만족을 잘 다스리는 게 자유이고 행복이겠지.
이런 생각을 허던 중에 "풍미"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음식의 고상한 맛
풍미는 묵혀서 생겨나는 것인가.
생각을 묵혀야 하는데, 묵힌다는 것은 방치가 아니라 관리를 하는 것이라 신경이 쓰여 피곤하다.
빨리 단정 짓고 치워버려야 하는데
그래야 미니멀하고 정리된 삶이 되는데
열어 놓고 기다려 주는 태도가 습관이 되면 덜 피곤할까
복잡한 게 아니고 다채로운 건가
어쨌든 따듯하지 못했던 그때 나는 불안과 싸우느라 그랬던 거겠지.
"성숙한 취향"을 제품에 결합시키면 급을 나눠 강요하는 것 같으니 뉘앙스를 누그려 뜨려야겠다.
당신의 취향 정도?
사소한 취향?
생활인의 취향? 풍미?
...
모르겠다. 또다시 생각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