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스완슨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읽고
'죽여 마땅하다.'
생소한 말이다. 읽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그리고 말해본 적도 없었다.
우리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고 '죽어 마땅하다.'고 얘기하지, '죽여 마땅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단지 한 글자, '어'와 '여'만 다를 뿐인데 담고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소극적인 바램 혹은 소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후자는 내가 죽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담고 있다.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주인공 '릴리'는 여러 번의 살인을 저지르는데, 살해당한 사람들은 누가봐도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릴리는 그들을 직접 죽였다.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릴리가 '썩은 사과'라고 표현했던 이들은 어린 소녀에게 성추행을 일삼거나, 여자친구를 속이고 양다리를 걸치던 사람, 부유한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던 사람 등 말 그대로 '썩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릴리는 이들을 한 명씩 계획적으로 살해하는데, 어느새 그녀의 살인이 성공하고 무사히 도망갈 수 있기를 응원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마치 그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를 수호하는 다크 히어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이야기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릴리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사실 이런 이야기는 릴리 뿐 만 아니다. 복수를 위해, 또는 삶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식들은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비단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 마땅한 사람을 진짜 죽여버리는 건 과연 정당할까?'
정답은 당연히 'No'이다.
살인이 정당화되기 시작하는 순간 세상에 살아남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법'을 만들고 죄에 따른 적절한 형벌 기준을 마련하였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접 벌하는 대신, 합법적인 기준 아래 공권력이 대리하여 처벌하는 방식으로 사회는 유지되고 있다.
문제는 공권력이, 법이 완벽하지 않다는 데 있다. 가해자가 법의 사각지대를 노려 처벌을 피하거나, 합당할 만큼의 처벌을 받지 않기도 한다. 또한 가해자는 처벌받으면 끝이지만 피해자의 상처는 평생 피해자를 괴롭힐 만큼 가혹하며, 무엇보다 법으로 처벌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하고 일상적인 경우가 대다수 일 것이다.
이런 경우 피해자들은 마음 속 그 억울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내가 이런 일을 당하더라도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진짜 죽여버리는 게 정당할까?'라는 질문에 당당히 'No'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릴리의 방식은 분명히 잘못되었으며, 결국 그녀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죽여 마땅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녀는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점차 살인에 무뎌지는 모습을 보인다.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진짜 죽이기 시작할 경우 어떻게 될지 보여주며 이 방식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죽이는 건 안된다.'
'그럼 피해자의 상처는?'
'법과 도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라.'
'해결되지 못한 피해자의 억울함은?'
'그래도 죽이는 건 안된다.'
결국 이런 생각이 맴돌며, 결론내지 못한 찝찝함을 남긴 채 책장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