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
[20XX년 12월 22일, 화요일]
<PM 05:58>
진규가 앉아있는 창구 맞은편에 마스크를 낀 여학생이 다가왔다. 한창 퇴근준비를 위해 가방을 정리하던 진규는 여학생이 다가온지도 몰랐다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신입생일까? 학교의 상징인 검붉은 색이 아직 선명한 과잠을 입은 여학생이 뭐라 얘기하지만, 그녀가 쓰고 있는 마스크와, 코로나 때 설치했다가 아직 방치해 둔 투명아크릴창에 방해받아 잘 들리지 않았다.
"네?"
"저 등록금 납입증명서 발급받으려 하는데요."
순간 자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는 걸 느낀 진규는 아차 싶어 표정을 고쳐지었다. 얼룩과 흠집이 가득한 아크릴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설마 여학생이 표정을 봤을까 하는 걱정이 잠깐 스쳐갔다.
대학교 교직원, 특히 누구나 알아주는 K대학교에서 일한 다고 하면 다들 '신의 직장' 아니냐며 부러워하지만, 계약직일 뿐인 진규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정규직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보람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이지만, 그나마 시간 맞춰 칼같이 퇴근하는 게 유일한 낙인데 눈앞의 여학생이 그걸 망치려고 하니 표정관리가 될 리가 있나.
"여기 서류요. 혹시 다음에도 발급받을 일 있으면 조금 일찍 와주세요. 아니면 번거롭게 여기까지 올 필요 없이 본관에 있는 서류발급기에서 발급받을 수도 있어요."
혹시나 맞은편 학생이 불만 섞인 컴플레인을 걸까 걱정된 진규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서류를 건네주었다.
<PM 10:43>
"위이이이 잉."
"드르륵드르륵."
7평 남짓한 진규의 원룸에는 싸구려 냉장고가 내는 모터소리와 마우스 휠에서 나는 스크롤 소리만 들렸다. 자취 초반에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밤새 들리는 대학가의 소음도 아니었고, 좁고 열악한 월세방도 아니었다. 본가에서 살 땐 냉장고 모터소리가 이렇게 큰 지 몰랐던 진규는 집주인에게 냉장고를 빼달라고 해야 하나 생각했을 정도로 이사 후 며칠 동안 소음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맞았는지 이제 냉장고 모터소리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진규는 한 시간 넘도록 넷플릭스의 영상 목록과 미리 보기만 훑어보다가 결국 무엇을 볼지 결정 못하고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그의 손에는 한 모금 마셔보기도 전에 이미 미지근해져 버린 캔맥주만 남았다.
알람
평일 07:00 ON
캔맥주를 다시 냉장고에 넣고 침대에 누운 진규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의 알람을 확인했다. 사실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웬만하면 바뀔 일 없는 설정이지만 잠들기 전 알람을 한 번 확인하는 건 이미 그의 오랜 습관이 되었다.
'설마...'
퇴근 전에 들었던 걱정이 그의 머릿속을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11시가 되니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
[20XX 년 12월 23일, 수요일]
<AM 09:07>
"딸칵"
뒷자리의 성은 씨가 센터 출입문쪽에 설치해 놓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켜는 소리가 들린다. 2년째 연애 중이라는 그녀는 오늘 데이트가 있는지 평소와 달리 한껏 꾸미고 온 티가 났다.
"성은쌤, 오늘 데이트 가시나 봐요! 원피스가 잘 어울리시네요."
빈말로 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입은 블랙 원피스는 정말 잘 어울렸다. 평소 성은 씨에게 관심이 있던 진규는 그녀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종종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표현했다. 정규직이자 진규의 상사인 그녀가 그에게 관심을 줄 리 없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사람이 꿈은 꿔볼 수 있는 거 아닌가.
"감사해요, 진규쌤. 그런데 혹시 오늘 자유게시판 확인해 보셨나요?"
"아니요. 왜요?"
"한 번 들어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4, 5년 전, 진규가 대학생일 때만 하더라도 학교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은 학생들이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는, 꽤나 유용한 정보의 장이었다. 그러나 '에브리 타임(이것마저 줄여서 '에타'라고 한다)'이라는 그들만의 공간이 생긴 후, 자유게시판에는 동아리 모집이나 공모전 소개, 알바 모집 등의 홍보글만 간간이 올라올 뿐이었고, 아주 가끔 학교에 대한 불만글들이 올라왔다.
설마가 진짜 사람 잡았나. 진규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들어가 봤다.
글번호 10352
제목: 제증명센터는 아침 일찍 가세요
급하게 서류 발급받을 게 있어서 제증명센터 문 닫기 전에 겨우 도착했는데 늦게 왔다고 눈치 주고, 웬만하면 서류발급기 이용하라고 하네요. 가시려면 다들 일찍 가세요.
진규는 설마 했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보다, 자신이 추파를 던졌던 성은 씨 앞에서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해 주세요."
성은 씨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PM 12:04>
대학교에 근무하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학생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렴할 뿐만 아니라 제증명센터와 같은 건물에 있어 식사는 거의 매일 학식으로 해결해 왔다. 게다가 K대학교의 학식은 SNS에 자주 소개될 만큼 맛이 괜찮았다.
진규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식당으로 내려갔다. 식권판매기 앞에는 다른 교직원들과 공강인 학생들이 식권을 구매하기 위해 줄지어 있었다.
학생식당 식권은 분홍색의 7,000원짜리 교직원 식당 식권과 연두색의 5,500원짜리 학생 식당 식권 두 종류가 있지만, 교직원 식당이라고 교직원만 갈 수 있는 건 아니고, 반대로 학생 식당이라고 학생만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든 1,500원만 추가로 내면 교직원 식당에서 더욱 다양한 구성의 메뉴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고, 종종 그렇게 먹는 학생들이 보인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진규는 식권판매기 화면에 뜬 두 가지 항목 중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습관적으로 '학생식당 식권'을 눌렀다. 출력된 연두색 식권을 뽑으려던 그때, 그가 좋아하는 '메종 프란시스 커정 바카라 루쥬 540'의 달콤한 요구르트 향이 코 끝을 찔렀다. 연갈색의 긴 웨이브 머리를 하고 하얀 폴로 랄프로렌 셔츠를 입은 여자 한 명이 분홍색 식권을 들고 진규의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괜찮은데? 인기 많을 거 같은데 계약직인가?'
'데이트할 때 돈 많이 써야 할 거 같은데.'
'빨리 먹고 나가서 번호 한 번 따봐?'
...
"쨍그랑!"
시끌벅적하던 학생식당이 잠시 정적에 빠지고, 스테인리스 그릇이 바닥에 굴러가는 소리만 메아리처럼 들렸다. 범인은 진규였다. 머릿속에 남은 향수녀의 잔상을 가지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진규는 식판을 들고 가다가 뜨거운 국물이 손에 넘쳤고, 결국 식판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그의 구레나룻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PM 07:32>
"삐삐삐"
전자레인지 문을 열자 살짝 뜯어놓은 햇반 포장지 구멍으로 김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톱 끝으로 살짝 잡고 책상으로 가져갔다. 책상에는 도시락 김 한 봉지와 며칠 전 반찬가게에서 사 온 멸치볶음, 무생채, 그리고 고사리 나물이 용기에 담긴 채 놓여있다. 몇 년에 걸친 자취생활을 하며 그가 내린 결론 중 하나는, 끼니는 햇반과 반찬가게의 반찬으로 때우는 게 가격과 건강을 생각했을 대 제일 낫다는 것이다. 물론 반찬가게에서 제육볶음이나 계란 장조림 같은 비싼 반찬은 쳐다보지도 않고, 주로 오징어채, 멸치볶음, 무말랭이, 도라지나물 등 몇 가지 반찬을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돌아가며 사 먹고 있다.
'오늘은 그냥 라면 끓여 먹을 걸 그랬나.'
어제도 먹었던 반찬들을 또 먹으려니 지겨웠지만, 배달시키기에는 돈이 아까웠고 라면을 사러 다시 나가자니 날씨가 너무 추웠기에 체념하고 의자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PM 09:06>
탄산이 가득 담긴 시원한 맥주가 진규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를 검색해 가며 새롭게 볼만한 넷플릭스 시리즈를 찾았고 덕분에 오늘은 캔맥주를 깔 수 있었다.
시카고에서 살던 여주인공은 프랑스어도 못하면서 파리의 마케팅회사에 취직한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여주인공이 예뻐서 계속 보게 된다. 저런 여자가 자신의 여자친구라면 어떨까. 맥주는 그의 상상을 한 단계 더 대범하고 즐겁게 만든다.
<PM 11:23>
알람
평일 07:00 ON
계속 보다 보니 넷플릭스 시리즈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평소보다 눕는 시간이 늦어졌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내일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펼쳐질 것이기에... 아니다, 크리스마스이브니깐 좀 들뜬 분위기는 있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맥주 때문인지 금방 눈앞이 캄캄해졌다.
[20XX년 12월 24일, 목요일]
<AM 02:54>
"삐-"
어두운 방 안에서 갑작스럽게 스마트폰 화면이 밝아지며 경고음이 들렸다.
위급 재난 문자
[서울특별시] 오늘 2시 51분 전국에 재난위험경보 발령.
한반도 근처에 지름 약 1.5km의 운석 충돌이 예측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최대한 지하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