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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Sep 09. 2023

어린 루이14세와 오를레앙공작

형제의 그림자  - 파니 헨젤 "이탈리엔"

영국 왕실의 해리왕자의 자서전이 얼마전 출간되었다. 제목은 "Spare", 스페어 타이어 할 때 그 스페어다. 여유분, 비상시에 쓸 예비용 이런 뜻이다. 자신을 스페어에 비유한 인생이 짠하기도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1인자와 2인자를 구분하여 교육시켰던 왕실의 관례를 깨고 어머니 다이애나는 해리를 형인 현재 웨일즈 공인 윌리엄과 차별없이 교육시켰다. 들리는 썰에 의하면 왕실의 대를 잇는 형만큼 보상해주기 위해 유산도 더 받았다는 썰도 있다. 어머니의 비극적 죽음 뒤에는 그에 대한 보상심리때문인지 왕실 가족들의 편애를 받으며 컸다고 한다.


콩가루 집안에 태어나 심적으로 힘든 점은 있었겠지만, 본인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인간이라고 호소하면서 가족들의 치부를 들쳐내는 탓에 순식간에 친근한 악동 왕자에서 국민 밉상으로 전락했다. 영국 국민들 중엔 굶는 사람도 있다는데, 미국 여배우와 결혼하여 돈을 펑펑 쓰다가 왕실이 자신을 차별한다며 의무를 저버리고 미국의 대저택에서 빈둥빈둥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게 다행이다 싶다.


남부럽지 않게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 티타늄 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면서 왕관을 못 쓴다는 점이 평생을 지배할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서러운 일일까? 일반인보다 누리는 것이 많은데 같은 피를 물려받은 형제가 가진 것을 보면 욕심이 나긴 나나 보다. 단지 네가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고 모든 걸 다 물려받는 건 불공평해...라는 심보인데, 그게 운명 아니겠는가? 사람의 힘으로 어쩌지 못 하는 팔자라는 것 말이다.


물려받을 것도 지킬 것도 많은 왕실에는 일반 가족들과는 다른 승계 법도라는 게 존재한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른데, 이를테면 영국의 경우 여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지만, 다른 유럽 국가에서 여자는 왕위에서 제외였다. 동양에서는 서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지만, 서양에서는 정식 결혼 외에 나온 자식은 무조건 사생아 취급이었다 (가끔 예외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의 오랜 번영을 위해 자식을 많이 나아 다복하게 지내는 것은 권장되었지만, 왕위계승자를 제외한 나머지 개인들의 일생은 왕실의 부유함과 가장인 아버지나 형의 결정에 따라 행,불행이 갈렸다. 이리저리 재산을 상속하면 몇 대만 지나면 먼지처럼 사라지는게 자명하니, 대부분의 왕가의 재산은 "장자에게 몰빵"하는 구조다. 그나마 왕실이 부유하여 물려받을 부스러기 재산이라도 있다면 한평생 남부럽지 않게 왕자님 소리 들으며 살다, 능력있으면 재산을 불려가며 자손들한테도 물려주고 조상님으로 칭송받으며 살다가는 거고, 가난한 왕실의 왕자라면 왕자 수준의 품위 유지를 위한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이웃나라 공주나 부잣집 처자 심지어 미망인들에게 열심히 자기 어필을 해야하는 종마 신세였다. 아들들도 이러할진데 딸인 공주들의 인생은 더욱 기구했다. 조국의 번영을 위해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하는 나이때에 동갑내기면 다행이고, 10살, 20살 연상의 말도 안 통하는 외국 왕자들에게 팔려가는 신세들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 요즘처럼 전쟁도, 정략결혼도 없는 시대에 누릴 것 다 누리고 물려받을 것도 많은 대영제국 둘째 왕자가 "저는 스페어에요, 슬퍼요"라고 징징대니 갑자기 시대가 회귀한 느낌마저 들면서 피곤해진다. "네가 슬프면,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니"라는 심정이랄까. 형제간에 어떤 불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원만하게 해결하길 바랍니다.


스페어의 존재는 유구하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연애결혼의 역사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낭만주의의 유행과 함께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부부는 집안의 명예, 재력, 권력에 의해 맺어졌다. 그렇게 만난 부부들이 운명처럼 천생연분이라 느끼고 평생 아끼고 살았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계약으로 만났으니, 애정따윈 있을리 만무하고, 외모나 성격이 마음에 안 들어도 체면이 있으니 헤어지진 않는다. 각 방을 쓰되 대를 이어야 하니 자식은 낳아야 한다. 아들을 낳으면 드디어 한시름 놓는다. 그런데 옛날엔 유아사망도 다반사고 전쟁, 질병으로 요절하는 경우가 많으니 "스페어"가 필요하다. 둘째 아들까지 낳고 나면 드디어 부부의 의무는 끝났다. 집안의 승계도 굳건하겠다 이제 나의 인생을 즐겨야지. 부부는 서로 무언의 합의하에 애인을 만들고 각자 인생을 즐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왕실, 가문, 집안이라는 커다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부품들이다. 모두 각자의 역할에 따라 충실히 움직이고, 운명의 얄궃은 장난만 없다면, 가문의 영광이 대대손손 지속되니 조상님도 행복하고, 나도 좋고, 자손들도 좋다. 의무만 지킨다면 사소한 일탈쯤이야 눈감아 줄 수 있다.


   


가끔 운명의 장난으로 둘째가 첫째보다 비범하거나, 야망이 큰 경우가 있다. 큰 아들이 그리 못 나지 않더라도 둘째 아들이 뛰어나면 상대적으로 첫째 아들의 왕위계승자로서의 자리가 빛이 바랜달까. 수양대군처럼 삼촌이 조카의 자리를 탐하는 경우도 생기고, 형보다 동생이 뛰어나면, 형의 위엄이 떨어지면서 사악한 무리들이 비범한 동생을 부추켜서 왕위를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잘못하다간 형제싸움에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역사책 한 페이지 구석에 과거형으로만 존재하는 처지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뿐이랴, 그 사이에 죽어나는 백성들은 또 무슨 죄인가? 집안이 아니라 나라가 폭싹 망할 수 있다.  


둘째 아들에게는 잔인한 일이지만, 이를 방지하기 위해 "넌 둘째고 형이 있는한 전혀 너에게 가능성이 없다"고 야망의 가능성을 거세시켜버린다. 특히 프랑스 왕실처럼 물려받을 것이 많지만,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덕에 늘 귀족들이 호시탐탐 왕위의 전복을 노리는 경우엔 왕실의 위계질서를 굳건하게 만들어 위엄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안느 왕비는 5세가 되기도 전에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루이 14세의 왕권을 굳건히 하고 아들들을 지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왕비이자 어머니로서의 의무였다.  


왕실이나 귀족 집안에서 아들을 낳으면 한동안  여장을 시켜 키운다. 우리나라에서도 왕족이나 양반집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한동안 "개똥이"같이 천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어린 아기를 질투하는 마귀와 같이 불길한 것들로부터 아기를 지키려는 일종의 미신이다. 재밌게도 안느 왕비는 둘째 아들의 "여장"을 꽤 오랫동안 지속했다. 딸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종의 정치적 전략인지, 그림에서 보듯이 이미 다 자라 걸음마를 넘어 뛰어다닐 정도의 나이인데도 여장을 유지했다.


당시에는 왕의 초상화를 그리면 이를 복제하여 지방의 귀족들에게 하사했다. 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겐 이미 왕실엔 "어린 왕"과 만일을 대비한 "스페어"가 있으니 딴 마음 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겠다. 비록 어리긴 하지만 또랑또랑한 눈매에 어른처럼 옷을 입고 있는 형의 위엄이 동생의 여장과 대비되어 더욱 돋보인다. 동생이 여장을 하긴 했지만 어떠한가? 생물학적 남자인 이상 왕위를 잇는데 아무런 하자는 없다.


문제는 어린 둘째 아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여장을 즐겨 했다는 점이다. 잘 생기고 형인 국왕의 총애를 받는 "무슈 도를레앙 (Monsieur d'Orleans)"은 전쟁에서 뛰어난 무훈도 세우고, 불행하긴 했지만 2번의 결혼을 통해 자손도 남겼다. 그런데 동시에 여장의 영향인지 남자도 좋아해서 슈발리에라는 미남자와 뜨거운 로맨스도 나눴다. 원래 성향이 그러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동물의 왕국같던 왕실에서도 공개적으로 여장을 하고 남자애인과 애정행각을 벌이는 그의 취향은 꽤 특별한 것이었다. "태양왕"이라 불리는 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며,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기는 형을 바로 코 앞에서 지켜보며, 바라보기만 해야 할 뿐 기회조차 허용되지 않는 둘째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신을 저주했을까?


전장에서 세운 무훈을 통해 스스로도 자신도 형에  못 지 않은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에게 고개를 숙이며 복종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불공평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커서도 여장을 즐긴 건 어린시절부터 여장을 강요받은 스페어로서 비틀려진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을까? 아니면 정해진 운명에 대한 순종이었을까?


지금의 해리 왕자와 달리 그는 형의 충실한 신하로 남아 평생을 왕의 동생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거디에다 혁명으로 끊긴 루이 14세의 혈통을 대신하여 프랑스 부르봉 왕실의 혈통이 그의 자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쯤이면 성공한 스페어의 삶이 아닐까?


장자 승계의 원칙에 따라 영특한 장손에게 모든 걸 양보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꿈을 포기한 경우는 최근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산업화 시절 집안의 기둥인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어린 소녀들은 학업 대신 공장에 나가 일을 했다. 장손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고, 우리 집안의 모두의 기쁨이니까, 그들의 희생은 당연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독일의 어느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도 재능있는 어린 동생을 위해 그에 못 지 않게 재능이 넘치던 누나가 꿈을 포기해야했던 일이 있었다. 바로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인 파니의 이야기다. 괴테에게 모짜르트를 능가하는 신동이라고 인정받은 어린 동생만큼 재능이 있었던 파니는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에 의해 꿈이 좌절된다. 아버지는 딸과 아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고 최고의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한계는 명확했다.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너에게 음악은 장식품 같은 것일뿐, 그것이 네 삶의 중심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15살이 된 딸에게 아버지가 보내 편지의 일부이다. 뒤 이은 내용에는 정숙한 여인으로서의 명예의 중요성과 동생의 성공을 같이 응원하라는 당부가 써져있다. 음악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은 고귀한 상류층 여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유하고 좋은 남편을 만나 현모양처로 자식을 낳아 키우며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부성애의 발로였겠지만, 그러기엔 파니의 재능은 너무나 뛰어났다.


다행히 그녀는 부유한 친정에서 살롱음악회를 주관하며,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던 동생과 비교하면 소박하지만, 꾸준히 자신의 꿈을 조금씩 펼쳤다. 재력은 딸렸지만 착한 성품의 미술가 남편은 부인의 꿈을 응원했고,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친정어머니 역시 늘 딸의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생인 펠릭스도 늘 누나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인지, 그녀를 물심양면 도왔다.


어머니의 기지로 동생 펠릭스의 작품집에 슬쩍 끼어넣은 파니의 작품은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연주되는 영광을 얻었다. 바로 1827년 발표된 멘델즈존의 "12개의 노래"라는 곡인데, 이 중 8,9번이 파니의 곡이라고 한다. 그 중 8번 "이탈리엔 (Italien)"이라는 노래를 여왕은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이 가득한 이 곡엔 동생인 멘델스존의 음악처럼 전혀 그늘지지 않은 경쾌함과 즐거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까지... 음악가보다 주부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파니는 출산과 동생의 명성에 점차 뒤쳐지는 자신의 현실에 점점 우울해졌다. 특히 집안의 가장이 된 동생은 더 이상 누나의 작곡활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딸에게 "여성으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했던 보수적 아버지가 그에게는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혹독하게 주지시켰기 때문이다.  누나와 더 나아가 가문 전체의 체면과 명예가 우선이 되어버린 동생에게 귀부인의 교양있는 취미활동을 뛰어넘는 누나의 음악활동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대음악가인 동생의 지지를 잃어버린 파니는 한동안 움츠러들어 살롱 음악회에만 만족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번 겨울엔 단 한곡도 작곡하지 못 했어, 연주는 많이 하고 있지만, 작곡은 하지 않아. 가곡을 작곡한다는게 무슨 느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1838년 파니가 펠릭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가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축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듬해 다행히 친정의 도움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품 그리고 베를리오즈, 마스네와 같은 예술가들을 만나며 다시 예술가로서의 꿈을 다진다. 이를 계기로 피아노 모음곡 "1년 (das Jahr)"와 가곡을 창작하며 열의를 불태우며, 동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46년에는 자신의 곡을 일부 발표하여 호평도 받는다. 특히 "1년"은 남편 헨젤의 삽화와 당대 최고 시인들의 작품이 같이 덧붙여져 일종의 종합예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제 겨우 음악가로 명성을 얻는가 싶던 1947년, 작품 발표회 리허설을 하던 도중 그녀는 손가락이 마비되는 증세를 느낀다. 그리고 그 날 밤 뇌출혈로 허망하게 사망한다. 최고의 조언자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던 누나의 사망에 충격을 받은 펠릭스 또한 점점 시름시름 앓다가 같은 해 38세라는 이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는 죽기 전 누나의 작품을 정리하여 출판하는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누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평생을 동생의 그림자에 가려져 살다가, 이제 막 꿈을 펼쳐보려했을 때 병으로 사망한 파니의 삶은 운명의 얄궃음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허용되었지만 단 한가지만이 허용되지 않는 삶을 사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특히 그 한가지가 평생의 꿈이라면 말이다. 한 발자국만 디디면, 손만 뻗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그 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살아야하는 운명은 저주일까? 아니면 그것만 포기하면 모든 걸 누릴 수 있기에 축복받은 인생일까? 자신의 야망과 재능을 숨기며 업악받는 대신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다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1인자에게는 나름 1인자의 고충이, 2인자에게는 2인자의 고충이 있다고 한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자신이 가져보지 못 한 건 더 좋아보이고, 그러기에 더욱 갈망하며 시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평생 꿈이라면 또한 나에게 그 꿈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한번쯤 눈 딱 감고 날개를 펴고 훨훨 날고 싶다는게 사람의 마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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