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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Sep 08. 2023

버릇없는 고양이

학교 - 테클라 봉다제프스카바라노프스카 "소녀의 기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다. 요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로 세상이 떠들석하다. 황망하게 젊은 교사들이 자살을 하고, 서로 그들의 죽음에 남의 탓을 한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내 생각엔 학교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소위 일부 학부모들의 무지가 벗어낸 비극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학교"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촌지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고, 체벌과 별도로 육체적, 정신적, 언어적 학대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심지어 지금 생각해 보면 성희롱이나 성추행도 빈번히 있었는데 그땐 세상이 그런 것 자체에 무심했던 때라 그려려니 넘어갔다. 교복장사와 같은 이권추구도, 일부 교사들의 무능도, 유교사상에 기인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가하는 부조리도 학부모에 대한 말도 안되는 요구도 모두 묵인되었다. 내가 학교 생활을 하던 시대는 "야만의 시대"였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 나에게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입가가 살짝 비뚤어진다. 물론 수업을 열심히 하는 선생님들은 있었지만,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은 없다. 불행한 일일까?


물론 학생들도 마냥 착하고 순종적인 학생들만 있지는 않았다. 가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끓어오르는 호르몬을 컨트롤하지 못 하기 때문인지, 별별 아이들이 다 있었다. 5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두 착하고 순종적이라면 그것 또한 기이한 일일 것이다.  사랑하여 결혼한 부부도 죽니사니 싸우는 마당에 서로 다른  50명 이상의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 모여 반나절이상을 함께 보내는데 사이가 좋으면 이상한 일이 아닐까? 특히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사춘기 아이들의 변덕때문인지 늘 교실은 매일매일 다이나믹했다. 교과서에 나온 성악설을 몸소 증명하는듯한 아이들도 늘 있었다. "X라이 질량 불변의 원칙"은 교실에서도 통한다.  


학생에 대한 교사에 의한 폭력, 학생 사이의 폭력, 그리고 학생에 의한 교사, 특히 어리버리한 남교사와 여교사, 에 대한 조롱과 무시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어쩌면 -교무실에 있어본 적은 없지만- 교사에 대한 교사의 괴롭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선생님 두 분이 복도에서 멱살을 잡고 싸우던 기억도 있고, 선생님들끼리도 파벌이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요즘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땐 정말 대부분의 학생에게 중, 고등학교는 자러오는 곳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우연히 합격한 교육직으로서의 진로를 미련없이 포기했다. 나는 마음이 종지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교육을 받던 세대가 교육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동안 세상이 바뀌고, 체벌이 금지되고, 한반에 50, 60이 되던 학생 인원수는 줄고 줄어 인구절벽을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은 여전히 남는다. 그 기억을 간직한 교사들은 부조리를 없애고 "친구같은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정말 다행이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그렇지 않다. 나 역시 교사를 친구로 둔 입장에서 나의 친구들이 자랑스럽고, 그들이 고민할 때는 걱정도 된다. 하지만 만약 나의 자식이 학교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한다면 자식편을 우선 들 것이고, 학교를 원망하거나 의심 안 할 자신은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무엇보다도 새록새록 학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 난달까?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진상은 본인이 진상인 줄 모르고, 자식의 일이라면 평소엔 이성적인 사람도 돌변한다. 천사같은 인성을 가진 사람들만 교사시험에 통과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될 자격이 국가고시나 인성시험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정답이 없다. 그저 자신들을 돌아보고 자식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내 경험상,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잘 모른다.) 믿는 수 밖에...그리고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물론 뉴스에 나올 정도의 이상한 진상 학부모들이나 교사들 그리고 때에 따라선 학생에게는 법에 의한 제재가 필요하다. 학부모, 선생 또는 학생의 입장을 떠나 사회로부터 격리가 필요한 인간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래도 세상엔 나쁜 사람도 많지만 좋은 사람도 그만큼 많기에 희망을 갖고 싶다


이렇듯 애증의 학교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교복, 스쿨버스, 학교 종소리, 체육복, 실내화, 급식 등등...학교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것들. 그리고 대한민국 의무교육을 받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기억들...우리 시대엔 체벌이 있겠지...군대처럼...씁쓸하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나는 체벌을 찬성하는 입장이다. 문제는 체벌을 오,남용했던 교사들이지 체벌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체벌은 사실 우리만의 일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교육엔 당연하게 체벌이 뒤따랐다. 우리 김홍도 선생의 서당 그림이나 서양의 그림 등을 봐도 선생님들 손엔 늘 커다란 회초리가 들려져 있고, 옛 문헌을 보면 신분에 상관없이 체벌은 이루어졌다. 물론 때때로 왕가의 교육에선 고귀한 왕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으니 대신 맞아주는 하인이 있기도 했다.


우리에게 고양이 작가로 유명한 "루이스 웨인" 역시 고양이들을 의인화하여 학교 풍경을 다수 그려냈다. "건방진 고양이 (The Naughty Puss)"라는 제목을 가진 1898년 엽서삽화로 제작된 이 그림에선 대단히 화가 난 (속어로 빡친) 고양이 선생님이 학생의 엉덩이를 손으로 매우치는 모습이 나온다. 안 그래도 말 안듣는 고양이들을 한꺼번에 데리고 수업하기도 힘든데 "Miss Catty is A RAT (의역하자면, 선생님은 쥐새끼!)" 이라고 쓴 낙서를 보니 당연히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날 만하다. 그나마 엉덩이만 때리는 게 다행이다.


맞는 친구를 보며 고소해하는 학생, 한심해 하는 학생,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하는 학생, 그리고 눈치도 없이 "열받은 선생님"을 더 열받게 하려는지 장난을 계속 치는 학생 (아마, 다음 타자가 될 듯...) 등 교실 풍경을 해학적이고 유머스럽게 표현했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말을 안 듣는다. 쟤들이 그나마 고양이라서 다행이지 덩치 큰 사람들이었다면....뭉크의 절규가 떠오른다.   


이렇듯 학교를 생각하게 하는 애증의 요소 중 또 다른 하나라면 바로 학교종이 아닐까 싶다. "학교종이 땡땡땡"이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있지만, 대한민국의 학교종은 이 노래도 아니고 "땡땡땡" 거리지도 않는다. 간혹 이 학교종이 교복처럼 졸업생들이 출신학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학교종소리로 가장 많이 쓰이는 음악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 그리고 웨스터민스터의 종소리라는 흥미로운 조사도 있다.  


그 중 폴란드의 아주 긴 이름을 가진 여류 작곡가, 테클라 봉다제프스카바라노프스카가 1856년 작곡한 "소녀의 기도"는 처음엔 무제였다가 1859년 "소녀의 기도"라는 제목을 붙이고 3년만에 유명세를 탄다. 인생극장의 커튼을 여는 듯한 극적인 서주가 나오고 이어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주제가 나온다. 계속 이 주제가 트릴과 같이 반복되며 변주되는데 , 듣고 있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같이 어째서 이 음악이 학교종소리로 쓰였는지는 불명인데, 아무래도 한창 끓어오르는 피를 가진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이 듣고 온화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게 아닐까 한다.


강대국에 이리저리 치였던 폴란드의 시골에 태어난 평민 여성이었던 테클라 봉다제프스카바라노프스카에 대해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요절했다고 하는데 왜 요절했는지, 그리고 언제 사망했는지도 기록이 제각각이다. 여러 작품 중 그녀의 유일한 명곡이라 할 수 있는 소녀의 기도도 제목을 그녀가 스스로 붙였는지, 그리고 왜 그런 제목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작곡가의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런지 엘리제를 위하여와는 달리 3년 내내 듣고도 "소녀의 기도"를 모르는 학생도 많다.


어쩌면 이 업계 관행상 출판업자가 잘 팔리라고 마음대로 "소녀의 기도"라고 붙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작곡자나 출판업자나 이 노래가 저 멀리 동쪽 끝의 나라에서 학교종소리로 사용되리라고 꿈에도 상상 못 했겠지만...(아마 그녀가 이 사실을 안다면 매우 좋아했을지도...?!)


소녀가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녀가 더 이상 아닌 나는 이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음악처럼 오늘도 전국의 학교에서 생활하는 교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교행직 여러분들의 안녕을 바란다. 모두 서로를 배려하며 둥글둥글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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