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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Sep 12. 2023

초콜릿을 나르는 소녀

I need you!  - 바흐 "커피 칸타타"

아침에 일어나면 늘 루틴이 있다. 바로 따끈따끈한 찻물을 끓이는 것. 굳이 차를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기포트 안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힘찬 하루를 위한 에피타이저랄까. 일종의 신성한 의식인 셈이다.


최근 유튜브를 보면서 이런 의식이 꼭 나만의 것이 아니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브이로그를 보면 너나할것 없이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으로 향해서 향긋한 커피를 내려마시며 여유롭게 하루를 준비한다. 커피의 향과 맛은 모두 각성효과가 있으니 멍한 정신을 깨우기에 안성맞춤이다. 나 역시 뒤늦게 커피에 입문하여 하루에 네다섯잔씩 마셨다. 모든 일에는 득과 실이 있으니 엄청난 집중력과 깊은 잠을 맞바꿨다.


그러나 한번 맛들인 커피를 끊기는 힘들다.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삼오오 커피집 앞에 모여있는 직장인들을 짠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악마의 음료"라고 불리던 커피지만 아이러니하게 우리나라 산업을 돌아가게 하는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일까?


과거 유럽에서도 16세기만 당시만 해도 커피는 이슬람인들이 마시는 음료이기에 "악마의 음료"라 불리며 죄악시되었지만 한번 커피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속으로 참회의 주문을 외우며 손에서 커피를 놓지 않았다. 바흐가 1734년부터 5년에 걸쳐 작곡한 "커피 칸타타"의 가사를 들여다 보면 당시 이교도의 음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비밀스런 지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Ei! wie schmeckt der Coffee süsse,           오! 커피는 얼마나 맛있는지,

lieblicher als tausend Küsse,                천 번의 키스보다도 달콤하고,

milder als Muscatenwein.                     모스카토 와인보다도 부드럽구나.

Coffee muss ich haben!                      커피, 커피를 마셔야 해!

    

거의 중독수준인 딸에게 아버지가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혼을 내자, 딸은 아버지의 잔소리에 굴하지 않고, 커피 예찬론을 펼친다. 말이 통하지 않자, 아버지는 산책 금지에, 옷도 안 사주고, 시집도 안 보낸준다고 하지만, 커피에 빠진 딸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결국 포기하고 신랑감을 찾으러 나서지만 딸은 고양이가 쥐를 포기할 수 없듯이 남편이 생긴다면 커피 마시는 자유를 허락하는 맹세를 받아내겠다고 다짐한다.


이교도의 음료에 중독된 부인과 딸들때문에 가장들이 발을 동동 구를 무렵,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카카오 또한 유럽에 소개되었다. 커피보다 훨씬 더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운 카카오로 만들어진 초콜릿은 특권층 중에서도 정말 소수의 특권층만 마실 수 있는 고급음료였다. 특히 소화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귀족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하인들이 가져온 따끈한 초콜릿을 마셨다.



드레스덴에 있는 장 에티엔 리오타르의 "초콜릿을 나르는 소녀"는 소박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정말 아름다운 파스텔화이다. 투명한 유리잔, 구겨진 앞치마 그리고 살짝 보이는 매끈한 신발등에서 보이는 화가의 놀라운 테크닉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꼿꼿한 자세로 초콜릿이 준비된 쟁반을 들고 있는 소녀의 묘한 매력에 푹 빠져든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로 주인마님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소녀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침 일찍 일어나 멍한 정신에 향긋하고 달콤한 초콜릿 향기가 바로 코 앞에서 나는데, 어젯밤 늦게까지 무도회에서 신나게 놀다 돌아와 늦잠을 자는 주인마님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아니면 엄하고 까다로운 주인 마님의 취침시간에 맞춰 방문앞에서 대기하고 상황이라면? 또는 아무도 모르는 주인님이나 주인마님의 비밀스런 애정행각을 소녀만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소녀의 무표정은 이런저런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아침에 일어나면 즐거운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전날 아주 행복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속을 알 수 없는 하녀가 가져다 주는 따끈따끈하고 달콤한 초콜릿음료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직접 손으로 따라 마시는 향긋한 커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꼭 음료가 아니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서서히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뛰는 조깅이 될 수도 있고, 어젯밤 읽다만 재밌는 소설의 마지막 장일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지루한 쳇바퀴같은 일상을 조금이라도 특별히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반짝반짝 재밌고 만들어 준다. 그렇다면 아침 일찍 매일 초콜릿을 나르고 하루 종일 넓은 저택을 청소도 하면서, 까다로운 마님의 시중을 들어야 했던 어린 소녀가 자신의 고되고 지루한 삶을 재밌게 만들기 위해 빠져든 사소한 취미 또는 일탈(!)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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