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좋은 것의 의식적인 반복은 '습관', 좋지 않은 것의 무의식적인 반복은 '버릇'이라고들 한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습관, 감사 일기를 쓰는 습관, 일찍 일어나는 습관 같은 노력 하면 크게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고약한 말버릇, 나쁜 손버릇, 다리를 떠는 버릇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며 바꾸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나는 잠자리에서 매일 30분 정도 책을 읽다가 잠드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잠자리 독서가 습관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굳이 잘 맞춰진 알람을 확인하려고 스마트폰을 보다가 때마침 울리는 SNS의 알림을 덥석 물어 더 건조해진 두 눈으로 스러지듯 잠이 드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정확히는 책을 사는 것을), 지금처럼 꾸준한 독서 습관이 생긴 것은 사내에서 열렸던 플리마켓에서 중고로 구입했던『듄』덕분이다. 영화를 너무나 감명 깊게 봤던 터라 중고로 판매테이블에 올라와있는 아주 합리적인 가격의 신장판 6권 전집 세트를 도저히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패키지부터 책 상태가 어찌나 깨끗한지 새 책을 펼칠 때 들리는 특유의 양장 제본 접착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또한 1권 만해도 944쪽의 1460g에 달했다. 첫 장을 펼치자 이 거대하고 장엄한 대서사시의 시작과 함께 모래벌레 '샤이 훌루드'를 부르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영화『듄』의 2편을 기다리며, 그 사이 원작을 완독을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슬프게도 1권의 첫 번째 챕터도 읽어내지 못했다.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늘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심했냐면 주인공조차 등장하기 전이었다. 결국 시간은 흘러 영화의 후속작이 나왔다. 2편까지 보고 나니 원작 읽기에 대한 동기부여가 크게 떨어져 버렸다. 책이 깨끗했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펼쳐보지도 못한 나의 『듄』은 다시 또 다른 중고 서점으로 떠나갔다. 지금도 서점에서 마주치면 마치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난 듯 어색하고 아련한 마음에 못 본 척 지나친다. 난 그 후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잠자리 독서를 위한 몇 가지 나만의 규칙을 세우게 되었다.
잠자리에서 읽기 좋은 책을 선정할 때 첫 번째는 너무 크거나 무겁지 않은 책을 골랐다. 한 손으로 들고 보기에 편한 책을 골랐다. 보통 예전엔 사륙판이라고 불리던 (127*188mm) 사이즈나 B6 (128*182mm) 사이즈를 선호한다. 무게는 250g을 넘기지 않고 두께는 10mm 언저리의 가벼운 책을 좋아한다.
두 번째로는 뒷 내용을 보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흥미진진한 전개의 소설들은 지양한다. 오래전에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모방범』을 보다가 밤을 새운 경험이 있다. 출근을 해야 하므로 소설들은 주말에 양보한다. 반대로 너무 무거운 주제로 한 페이지조차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 책들 역시 피한다. (물론『듄』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최종 선택된 책들에는 에세이가 많았다. 평범한 일상 속의 소소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이야기들,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나눈 작가의 사진들과 이야기가 나를 매료시켰다. 때로는 작가의 표현에 먹먹할 때도, 가끔은 현실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공감했다. 더 읽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아껴서 읽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책을 읽다 잠들기 가장 최적의 자세를 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매일 그날의 기분과 쿠션들의 배치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리저리 쿠션들을 놓다 보면 갑자기 이거다 싶은 편한 자세가 나오고, 반쯤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왼손을 독서대로 변신시킨다. 펼쳐진 책을 새끼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으로 받치며 내 눈높이에 맞게 가져오면 모든 준비는 끝난다.
나는 인상 깊은 구절이 있는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으면서 보는데, 어떤 책들은 하도 접은 페이지가 많아서 모서리가 두툼해질 정도다. 그렇게 에세이의 세계 속에서 작가와 함께 거닐다 보면 서서히 잠이 오고 눈이 감기는 시점이 온다. 그럴 때는 침대 옆 협탁 위 조명을 끄고 안경을 벗어두고 이불속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바로 그 순간을 나는 너무 좋아한다. 잠의 세계로 가는 의식과도 같달까. 묘한 미소까지 지으며 잠이 들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어제 마지막으로 본 페이지를 펼쳐보고 나서야 비로소 출근 준비를 한다. 그렇게 한 명의 에세이 작가의 이전 작품들까지 찾아보면서 시작된 '읽는' 사람으로서의 시작은 순조로웠고, 작은 꿈도 움트기 시작했다. 바로 '쓰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적어온 일기 외에는 글쓰기 자체를 배워본 적도, 제대로 내 이야기를 써본 적도 없다. 무슨 글을 써야 할까 고민하며, 스쳐가는 찰나의 생각들을 최대한 놓치지 않게 늘 메모할 준비를 해둔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적어놓기 위해 펜과 메모지를 찾는 그 짧은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안타까운 경험도 많이 하고 있다. 종종 꿈을 꾸다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비몽사몽 한 상태로 스마트폰의 음성 인식 기능으로 웅얼거리며 남겨놓기도 한다. 물론 다음 날 다시 보면 텍스트로 변환된 내용이 암호처럼 남겨져 해독을 해야 하는 수준일 때도 있다. 그리고 유독 샤워할 때마다 좋은 영감들이 떠오를 때가 많아서 스마트폰을 가지고 샤워를 하게 된다. 깜빡한 날에는 여지없이 괜찮은 생각들이 떠올라 계속 샤워를 마칠 때까지 중얼거리며 기억하고자 애쓰기도 한다.
나는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몇 권의 작법서나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몇 십 편의 영상들을 보았다. 그 사이 운 좋게도 브런치의 작가로서 글을 쓸 수 있게 되며 몇 편의 글을 게재했지만 글쓰기의 달인들이 알려주는 내용들에 어느 날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하루의 끝에 남기는 일기와는 다르게 작법서들을 읽을수록 첫 문장을 떼는 것조차 더 힘들어졌다. 있어 보이는 글을 쓰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첫 문장을 쓰는 것조차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몰랐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내가 쓴 글을 통해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끊임없이 묻게 되었다.
한 문장의 시작조차 못하며 생각만 하고 지내던 어느 날, 나의 주변 세계에서의 큰 사고 소식을 접하였다.
그로 인해 안온한 내 하루의 일상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닌 수많은 우연이 만들어낸 운 좋은 나날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너지는 슬픔이 있던 그곳에는 내가 없었다. 그곳에 다른 누군가는 있었다. 다른 이의 고통에 빗대어 나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매일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잠자리에 미끄러지듯 들어가며 소소한 행복감을 느낀 것도 그냥 주어진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렇게 맞이한 오늘인 것이다. 그런 하루 속에서 나는 사유하고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한 문장이 귀하다.
지난 나의 글에서처럼 나의 꿈은 크지 않다.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막연한 꿈은 꾸지 않는다. '언젠가는' 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으로 이어갈 수 있는 꿈을 꾼다. 미래 어느 시점에 누군가 나에 대해 묻는다면, 나를 정의하는 단어가 '작가' 이길 꿈 꾼다. 생각을 글로, 인상을 사진으로 남기며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서 살길 원한다. 물론 내 앞에는 넘어서야 할 담이 놓여있다. 아직은 '쓰는 사람'으로의 삶, 그 너머를 보려면 까치발을 들고 턱까지 살짝 올려보아야 겨우 보이는 듯하는 그 인생의 모양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나의 꿈은 작다. 그래서 자주 이루고 새로운 꿈을 꾼다.
나의 꿈은 작가다. 그래서 자주 읽고 새로운 글을 쓴다.